[한민광의 고대 이집트 미술과 신화 #27] 룩소르, 대지에 새긴 문명의 미학⑨ 람세스의 아들, 오시리스가 되다: KV8 무덤의 미학에 이어
[문화매거진(이집트)=한민광 작가] ‘메르넵타의(Merneptah) 무덤(KV. 8)을 감상한 후 밖으로 나와 왕가의 계곡 깊은 또 다른 골짜기를 다시 걸어 들어간다. 이 메마른 협곡에 숨겨진 수많은 지하 무덤들을 차례로 마주하다 보면, 이번에는 유독 입구에서부터 묘한 긴장감과 확연히 다른 기운을 뿜어내는 14호 무덤(KV.14) 앞에 이르게 된다. 이곳은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마지막 여왕이었던 ‘타우세르트(Tausret)’와 제20왕조를 연 ‘세트나흐트(Sethnakhte)’ 왕이 함께 잠든 공동 무덤이다. 하나의 무덤 안에 두 명의 통치자가, 그것도 왕조의 교체기에 서 있던 이들이 함께 묻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왕가의 계곡이 품은 수많은 비밀 중에서도 역사적으로도 독특하고 미스터리인 무덤이라 할 수 있다.
타우세르트는 원래 파라오 ‘세티 2세(Seti II)’의 왕비였다. 그러나 남편 파라오가 죽고 어린 의붓아들(시프타, Siptah)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녀는 섭정이 되어 권력의 중심에 섰다. 아이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타우세르트는 마침내 스스로 파라오의 자리에 올랐다. ‘하트셉수트’처럼 남성의 상징을 걸치고 당당히 나라를 다스렸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영원한 안식처를 위해 이 위대한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영광은 길지 않았다. 혼란의 시기 속에 세트나흐트라는 강력한 군인이 등장했고, 타우세르트의 통치는 곧 막을 내렸다.
새롭게 왕이 된 세트나흐트는 자신의 무덤을 따로 파기 시작했으나, 도중에 다른 무덤과 맞닿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그는 이미 완성되었던 타우세르트의 아름다운 무덤을 차지하기로 결심했다. 여왕의 흔적 위에 자신의 이름을 덧쓰고 방을 넓혀 나간 결과가 바로 지금 방문객들이 마주하는 공동 무덤이다.
벽면 가득 채워진 그림들은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아 당시의 치열했던 삶과 간절했던 영생의 소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벽화 속 인물들은 어딘가 뻣뻣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선 하나하나에 살아 움직이는 듯한 정성이 깃들어 있다. 붉은 점토빛 피부와 세밀한 가슴 장식, 그리고 사제의 몸을 감싼 표범 가죽의 부드러운 얼룩무늬는 당시 예술가들이 단순한 규칙 속에서도 얼마나 감각적인 묘사를 시도했는지 잘 보여준다. 위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바닥에 웅크린 제물 소의 점박이 가죽 질감 역시 투박한 회벽 위에서 기묘한 생동감을 뿜어낸다.
긴 통로를 지나 무덤 깊숙이 들어서면, 파라오가 신들과 대면하는 웅장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앞서 여러 번 강조하였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왕은 단순히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지배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유일한 매개자이자 신의 아들이었다. 벽면의 그림 속에서 파라오는 정교한 줄무늬가 새겨진 두건(네메스 두건)을 쓰고 오른손을 들어 신을 향해 깊은 존경을 표한다. 그의 왼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는데, 이는 신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준비한 가장 순수한 공물이다. 예술가는 왕의 손목과 팔뚝에 얇은 선으로 정교한 팔찌를 그려 넣어 왕권의 고귀함을 시각적으로 강조했다.
가운데에는 마치 작은 집처럼 생긴 신전 모양의 구조물이 서 있고, 그 어두운 공간 안에는 미라의 모습을 한 신들이 엄숙하게 서 있다. 벽화가 많이 훼손되었지만 아마도 영원한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오시리스(부활을 상징)’ 신일 것이다. 파라오는 지상에서 이룩한 자신의 업적을 신에게 고하고, 사후 세계에서도 여전히 왕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림 속 파라오의 몸은 구석구석 붉은 갈색으로 짙게 칠함으로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흘러 벽면의 아랫부분이 툭 떨어져 나가고 거친 흙바닥이 드러나 있지만, 신을 마주한 인간 왕의 당당함과 경외심만큼은 감춰지지 않는다.
주변을 가득 채운 황금빛 ‘카르투슈(Cartouche,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나 신의 이름을 둘러싸던 끝이 묶인 타원형 테두리)’와 상형문자들은 이 그림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영원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파라오의 이름을 지켜주기 위한 신성한 주문이다. 글자 하나하나를 짙은 먹색과 붉은색으로 번갈아 채색한 예술가의 붓놀림(?)은 서예이자 동시에 훌륭한 회화 작품이다. 오른쪽에 서서 공물 그릇을 높이 든 파라오의 허리춤을 보면,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가벼운 ‘린넨 천(Lenen)’의 질감이 얇고 투명한 선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감탄하게 한다.
무덤 또 다른 벽면에는 보다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위엄이 강조된 순간이 기록되어 있다. 화면 중앙에는 머리에 커다란 두 개의 깃털 장식이 달린 높은 왕관을 쓴 인물이 제단 모양의 발판 위에 올라서 있다. 그는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긴 지팡이를 한 손으로 굳게 짚고 있으며, 다른 손으로는 앞서 서 있는 사제에게 무언가 명령을 내리는 듯한 몸짓을 하고 있다. 그의 옷차림은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치마와 화려한 황금빛 장식으로 꾸며져 있어, 그가 이 공간의 절대적인 주인공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황토색과 갈색의 조화로운 대비가 인물의 형태를 더욱 입체적으로 돋보이게 만든다.
그의 뒤와 앞에는 짧은 단발머리 가발을 쓴 세 명의 수행원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파라오의 통치를 돕던 고위 관료나 의식을 주관하는 사제들일 것이다. 그들은 모두 어깨에 하얀 천을 두르고 단정한 자세로 왕의 곁을 지킨다. 흥미로운 점은 인물들의 시선과 발의 방향이다. 이집트 예술가들은 사람의 몸을 그릴 때 얼굴과 다리는 옆모습을, 눈과 상체는 앞모습을 그리곤 했다. 이러한 독특한 표현 방식 때문에 인물들은 마치 고요한 춤을 추다가 멈춰 선 것과 같은 기묘한 리듬감을 만들어 낸다. 다리 근육을 붉은 윤곽선으로 한 번 더 강하게 잡아주어 멈춰 있는 신체 속에서도 강한 긴장감이 흐르는 듯하다.
발밑에 길게 이어지는 뱀 모양의 상형문자 띠는 이 공간이 현실 세계가 아닌, 신비로운 세상과 신화가 함께 있는 지하 세계임을 알려준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뱀의 형태는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인물들의 수직적인 배치에 부드러운 곡선의 유연함을 더해주는 시각적 역할을 하는 듯하다.
죽음 이후의 삶이 현실의 연장선이라고 믿었던 이집트인들에게 무덤 속 부장품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들은 영혼이 저승에서도 배고프지 않고 외롭지 않기를 바랐다. 벽면 한구석은 마치 거대한 창고나 화려한 백화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다양한 물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정연하게 나뉜 칸마다 고대 예술가들이 정성껏 그려 넣은 상징물들이 빼곡하다. 위쪽에는 파라오가 행진할 때 짚었을 법한 굽은 지팡이들이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아래로는 날카로운 칼과 무기, 그리고 신비로운 코브라의 형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 오른쪽에는 음식을 담았을 둥근 항아리와 값진 그릇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푸른빛과 붉은빛으로 채색된 커다란 바구니들이다. 그 안에는 곡식과 과일이 넘칠 듯이 담겨 있고, 그 위에 놓인 황금빛 빵들은 당장이라도 고소한 냄새를 풍길 것처럼 생생하다. 세월의 무게 때문에 벽의 왼쪽 아랫부분이 허물어져 내렸지만, 제물로 바쳐진 소의 다리와 머리 형상이 희미하게 흔적을 남기고 있다. 비록 육체는 흙으로 돌아갈지언정, 아니 정확히 말하면 딱딱한 미라의 모습이 되지만 벽에 그려진 이 수많은 제물이 마법처럼 되살아나 자신을 영원히 먹여 살려줄 것이라는 믿음, 그 순수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그림이다. 색채의 배치가 위아래로 대칭을 이루며 감상하는 우리에게 시각적인 안정감을 준다.
이 무덤의 벽화가 가진 진정한 가치는 신화 속 신들이 인간과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예술적 완성도에 있다. 장엄하게 그려진 신들의 행렬은 보는 이의 잠시 숨을 멎게 만든다. 맨 왼쪽에는 매의 머리를 한 하늘의 신, 호루스가 서 있다. 그는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통합을 상징하는 거대한 이중 왕관을 쓰고 오른손을 길게 뻗어 누군가를 맞이하거나 안내하고 있다. 그의 손끝이 향한 곳에는 연꽃과 성수가 담긴 아름다운 제단이 놓여 있어 의식의 성스러움을 더한다. 매의 눈 주변에 그려진 짙은 검은색 선은 신의 날카롭고 명료한 통찰력을 예술적으로 시각화하였다.
그 옆으로는 아름다운 두 여신이 차례로 서 있다. 이시스와 네프티스 여신일까? 그들은 머리 위에 신성한 상징물을 얹고, 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긴 지팡이를 쥐고 있다. 여신들의 피부는 부드러운 초록빛과 노란빛으로 칠해져 있어 현실의 인간과는 다른 신비로운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행렬의 맨 오른쪽에는 검은 자칼의 머리를 한 죽은 자들의 인도자, 아누비스가 당당하게 서 있다. 그의 붉은 몸과 날렵한 자칼의 얼굴은 무덤 전체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자칼의 긴 귀와 곧게 뻗은 코의 실루엣은 고대 예술가들이 동물의 특징을 얼마나 극도로 단순화하면서도 세련되게 포착해 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들의 머리 위로 꼼꼼하게 적힌 상형문자들은 사후 세계의 비밀스러운 주문들이다. 이 완벽한 밸런스와 부드러운 색채의 조화는 당대 최고의 궁중 예술가들이 이 무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증명하고도 남는다. 전체적으로 흐르는 붉은색과 황토색의 따뜻한 톤은 지하 세계의 어둠을 몰아내고 영원한 온기를 전해주는 듯하다.
의식의 행렬은 멈추지 않고 다른 벽면으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조금 더 닮은 듯 다른 네 명의 신성한 인물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다. 맨 앞과 세 번째, 네 번째 인물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두 번째 인물은 귀가 쫑긋한 자칼의 머리를 하고 있다. 이들은 사후 세계에서 죽은 이의 장기를 지켜주는 호루스의 아들들이거나, 지하 세계를 지키는 하급 신들일 수 있다. 화면 전체에 흐르는 일정한 간격의 배치는 고대 이집트 미술 특유의 정형화된 질서를 보여준다.
이들 모두 가슴에 화려하고 넓은 깃 장식을 걸치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정교한 치마를 입고 있다. 한 걸음 내딛는 다리의 근육과 꼿꼿하게 편 상체에서는 신성한 존재들 특유의 위엄과 흔들리지 않는 법도가 느껴진다.
특히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인물은 다른 이들과 달리 붉은색 의복을 길게 내려 입고 있어 시각적 단조로움을 깨뜨린다. 이 사소한 의복의 변화가 전체 화면에 독특함을 불어넣는 예술가의 영리한 연출 같다. 이들의 발치와 등 뒤로는 푸른빛이 도는 상형문자들이 세로로 길게 적혀 있다. 이 문자들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이 신비로운 존재들이 무덤 주인의 영혼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의 징표처럼 벽면을 단단히 받치고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채색이 일부 바래고 흙이 떨어져 나갔지만, 인물들의 외곽을 감싸고 있는 문자들은 여전히 또렷하게 남아 있다.
신들의 세계를 지나면 다시 현실과 종교가 만나는 장엄한 의식의 현장이 나타난다. 여섯 명의 사제가 줄을 지어 서서 무덤 주인을 위한 마지막 정화 의식을 올리고 있다. 맨 왼쪽에 서 있는 두 사제는 커다란 갈색 부대를 소중하게 맞잡고 있다. 부대 안에는 나일강에서 길어 올린 가장 깨끗한 물이나 신성한 기름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 액체로 무덤 안을 정화하고 영혼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역할을 맡았다. 부대의 둥근 곡선미와 사제들의 곧은 팔 라인이 시각적인 대비를 나타낸다.
가운데 두 사제는 높은 받침대 위에 놓인 커다란 그릇을 함께 높이 들고 있다. 그릇 위에는 신에게 바칠 특별한 공물이 정성스럽게 담겨 있다. 오른쪽에 서 있는 사제들은 한 손을 가슴에 얹거나 의례용 도구를 쥔 채,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행렬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의 하얀 치마에 그어진 섬세한 줄무늬와 가슴의 장식들은 예술가의 정교한 붓끝에서 탄생한 미술적 꼼꼼함을 보여준다. 인물들의 귀와 눈, 입술의 미세한 곡선까지 놓치지 않은 훌륭한 묘사력을 가졌다. 그림의 위아래를 가득 채운 수많은 상형문자 조각은 이 사제들이 읊조렸을 엄숙한 기도 소리를 시각적으로 재현해 놓은 듯하다. 수천 년 전 이 어두운 돌방 안을 가득 채웠을 향 연기와 낮게 읊조리는 기도 소리가 지금도 벽화 너머로 은은하게 들려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행렬이 주는 일정한 시각적 리듬감은 종교적 음악의 선율처럼 무덤 안을 고요하게 감싼다.
이 모든 벽화들이 향하는 종착지로 다시 첫 화면으로 향했다. 무덤의 여러 벽화 중 가장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에사후 세계의 군주에게 가장 신성한 생명력을 바치기 위한 극적인 순간인 ‘소 도살 봉헌 의례’ 장면이다. 표범 가죽을 몸에 두른 셈 사제는 한쪽 손을 길게 뻗어 벽면 전체에 흐르는 종교적 에너지를 주도한다. 호피 무늬의 세밀한 점들과 사제의 붉은 피부는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앞에서 허리를 굽힌 조수 사제는 날카로운 도살용 칼을 들고 제단 아래 누운 소를 정교하게 다루고 있다. 소의 앞다리를 잘라 바치는 이 행위는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죽은 이에게 새로운 힘과 생기를 불어넣는 가장 고귀한 희생 의식이었다.
오른쪽에 서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초록빛과 푸른빛 피부의 여인은 이 무덤의 주인이자,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여왕 타우세르트 본인이거나 혹은 그녀를 맞이하는 지하 세계의 신성한 존재일 것이다. 푸른색은 고대 이집트에서 나일강의 범람과 그로 인한 대지의 부활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따라서 이 푸른 피부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자 영원한 재생임을 확신하는 시각적 선언이다. 여인의 가녀린 체구와 대비되는 붉은색 긴 치마의 강렬한 색감은 부활을 향한 뜨거운 열망을 담아낸 예술적 장치일지도 모른다.
빛바랜 회벽 위에 그려진 이 간절한 그림들은 단순한 고대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정점에서 스러져간 여왕(신왕국 19왕조)과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왕(신왕국 20왕조),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저 멀리 별들의 세계에서 영원히 빛나기를 바랐던 인간의 가장 깊은 소망이 빚어낸 위대한 예술 작품이다. 우리는 이 거친 무덤 벽면에서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뜨겁게 숨 쉬고 있는 인간의 예술혼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거친 석회벽의 질감과 그 위에 스며든 천연 재료의 부드러운 색채는 시간마저 박제해 버린 고대 미술의 위대한 힘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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