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 줄 평
“길 위에 홀로 서서 우두커니 불완전한 어제를 바라보고 있다.”
▲시 한 편
<십리는 길고 > - 석민재
봄은 언제나 반쯤은 가짜라는 걸
벚꽃보다 상처가 먼저였다는 걸
아무도 몰랐던 거야
벚꽃 밟는 소리로 울고 부서지는 소리로 피고
어떤 사랑은 너무 예뻐서 계절을 망치지
기다리던 날에 비를 부르는 말이지
입 맞추기 직전에 돌아서는 뒷모습이지
말하지 않아도 될 말을 끝내 던져버리는
벚꽃은 순간인데 십리는 길고
사랑은 언제나 빨리 끝나고
벚꽃이 피어서 봄이 도망치나 봐
여름은 사랑의 마감일을 넘긴 채 기억을 되씹다가
혀끝이 쓰고
낙엽은 사실 벚꽃의 후회라는 것도 모르고
벚꽃보다 더 슬픈 눈이 내려도
다시 걸어도 십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넌 참 끝까지 아름답구나
넌 참 끝까지 아름답구나
▲시평
이 시의 공간 배경은 ‘십리벚꽃길’이다. 경남 하동군 화개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십리벚꽃길은 사랑하는 청춘 남녀가 두 손을 꼭 잡고 걸으면 백년해로한다고 하여 ‘혼례길’이라고도 한다. 이 시는 백년해로가 무색하게 사랑의 쓰린 상처를 먼저 언급한다.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온갖 꽃이 피어나는 봄의 화사함 뒤에 상처가 숨어 있다는 역설로 시작한다.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끝나지 않은 기억으로 봄을 소환한다. 처음 십리벚꽃길을 걸을 때는 이 행복한 순간이 영원할 줄 알겠지만, 그 사랑이 가짜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채 일 년도 걸리지 않는다. 다시 그 길에 서면 눈물뿐이다. 짧게 피었다 화르르 지고 마는 벚꽃은 이별의 상처를 대변한다. 특히 비가 내리면 길 위에 꽃잎이 가득하다. 한순간에 지는 게 벚꽃이다. 꽃을 소재로 한 이별, 길과 꽃을 밟는 행위, 꽃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객관화한다는 점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떠올리게 한다. 꽃은 감정 자체가 아니라 감정을 대신 말하는 사물이다. 하지만 이별을 바라보는 시간의 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진달래꽃」이 이별의 정한을 노래했다면, 이 시는 한순간의 아름다움이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탐색한다. 진달래꽃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숭고한 꽃이라면, 벚꽃은 다 보내지 못하고 상처받은 한순간의 꽃이다. 사랑을 하면 모든 계절이 아름답다. 한데 이 시에서 “사랑은 너무 예뻐서 계절을 망”친다. 사랑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뒤돌아서면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던져버릴 만큼 잔인하다. “반쯤은 가짜”인 사랑의 속성이다. 이별의 상처는 한 계절로 끝나지 않는다. 여름 지나 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진다. 이후 맞이하는 봄은 무언가 아쉽다. 완전하지 않다. “벚꽃은 순간인데 십리는 길”다. 사랑은 짧은데 기억은 오래 이어진다. “십리”라는 시어에선 가다가 “발병 난다”는 〈아리랑〉의 가사도 연상된다. 정서상으로 보면 이 시는 「진달래꽃」보다 〈아리랑〉에 더 가깝다. “넌 참 끝까지 아름답구나”의 반복은 떠난 연인이나 십리벚꽃길, 한때의 봄을 향한 혼잣말이다. 어떤 사랑은 순간이고, 어떤 마음은 영원하다. (김정수 시인)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의 잠』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과 평론집 『연민의 시학』을 냈다. 경희문학상과 사이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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