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린이의 마음이 어른의 마음과 다르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아요.” 『푸른 사자 와니니』(이하 『와니니』)를 쓴 이현 작가의 이 한마디가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며 어린이에 대해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적 판매 100만 부를 넘기며 큰 사랑을 받아온 『와니니』 시리즈의 마지막 10권을 출간하며 10년의 여정을 마무리한 그는 “어린이 독자들과 함께 쓴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어린이들이 건넨 질문과 아이디어, 응원이 한 권 한 권의 동력이 되었고, 그렇게 『와니니』는 어린이들과 함께 완성한 이야기가 되었으니까요.
이현 작가는 스스로를 ‘동화 작가’로 정체화합니다. 그가 동화를 쓰는 이유는 “어린이의 마음에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아직은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표현하기 어려운 어린이들이 자기 마음을 알아보고, 실패해도 괜찮다고 믿으며, 끝내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와니니』가 오래도록 어린이들의 마음에 자리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와니니의 성장을 따라 함께 자라온 어린이 독자들의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그 얼굴들에는 지금도 초원의 빛이 머물러 있습니다.
누적 판매 100만 부 『와니니』 시리즈. 어린이들과 함께 걸어온 10년
『와니니』 시리즈 완간을 축하드립니다. 10년 동안 함께한 긴 여정을 마친 소감과,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는지 여쭙습니다.
시원하고 후련해요. 저에게 즐거운 작업이고 좋은 성과를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늘 그만큼의 부담이 있었거든요. 작업을 다 마치고 나서는 특별한 얼굴이 떠올랐다기보다 내가 진짜 해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던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끈기 있는 사람은 아니거든요.(웃음) 살면서 보기 드물게 끈기 있게 해낸 일이에요. 그 이후 교정 작업을 진행하고 작가의 말을 쓰면서 모든 분들이 떠올랐는데,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얼굴은 단연 어린이들이죠. 『와니니』는 정말로 어린이 독자들과 같이 썼다고 생각해요. 제가 치사를 할 때는 진심이거든요.(웃음) 작가로서 정말 감사한 일이죠. 어린이들이 와니니를 사랑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 권 한 권 나아갈 때마다 동참해줬어요. 그만큼 제게 또 중요한 얼굴들이 있는데, 그분들은 학교와 선생님들이세요. 많은 어린이가 『와니니』를 만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분들 역할이 컸습니다. 학교에서 온작품 읽기*를 통해 어린이들이 깊이 있게 책을 읽을 기회를 갖게 되었지요. 선생님들의 노력과 열정으로 이루어진 교육과정이에요. 『와니니』도 그 바탕 위에서 많이 읽힐 수 있었고요. 언제나 어린이들 곁에서 애써주시는 선생님들께 각별히 감사한 마음이에요.
두 번째 책이 나오기까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 세렝게티에 직접 다녀오셨고요.
『와니니』를 시리즈로 확장하려는 계획은 전혀 없었어요. 어린이들이 “더 써달라”는 얘기를 자주 해주었는데, 보통 그건 책이 재미있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 의미로만 받아들였지 이 이야기를 더 써보겠다고는 마음먹지 못했던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출판 시장은 계속 좋지 않고, 저로서도 후속권의 결과를 자신하기 어려웠고요.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 어린이들이 꾸준히 이야기해준 덕분에 결국 저도 후속권을 쓰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였어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아는 세렝게티에 대한 지식은 모두 1권에 써버렸거든요. 구할 수 있는 한글로 된 모든 자료는 다 봤고, 바닥까지 다 긁어서 썼기 때문에 쓰려고 해도 쓸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세렝게티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첫 아프리카 여행이었어요. 그런데 그곳에 막상 도착하니 문득 드는 걱정이 드는 거예요. 혹시 내가 쓴 이야기가 다 엉터리였으면 어떡하지? 이미 책은 널리 읽혔는데, 수습할 길도 없고 기가 막히더라고요. 다행히 『와니니』 1권을 읽은 독자님들께 사과를 드려야할 일은 없었습니다.(웃음) 그렇지만 상상도 못했던 점이 있기는 했어요. 공간감이었어요. 세렝게티 국립공원 크기가 경상북도와 맞먹는데요, 정보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직접 느끼는 실감은 또 다르더라고요. 더구나 도시도, 마을도 없는 그저 탁 트인 초원이에요. 200만 마리의 동물들이 그 넓은 초원에서 야생의 습성대로 저마다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곳을 여행하면서 더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시리즈 10권을 채우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셨을 테지요? 이 방대한 이야기를 쓰려면 맺음에 대한 밑그림이 필요했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냥 후속권을 쓴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말씀드린 것처럼 세렝게티에 다녀와 좀더 욕심히 생겼지요. 그리고 감사하게도 2권 역시 큰 사랑을 받았고, 어린이 독자님들의 아이디어도 쏟아졌어요. 3권, 나아가 10권, 20권… (웃음) “와니니도 좀 컸잖아요. 이제
슬슬 커플 얘기가 나올 때도 됐어요”라든가 “다른 동물 이야기는 없나요?”라든가, 장난스러운 듯도 싶지만 사실은 꼭 필요한 아이디어들이 많았어요. 어린이들에게 “와니니가 몇 권까지 나오면 좋겠어요?” 하고 묻기도 했는데,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이 “10권”이기도 했어요. 한번은 왜 10권이면 좋은지 물었는데, 어느 어린이가 아주 설득력 있는 대답을 하기도 했지요. “10권짜리가 책장에 꽂아두면 딱 보기 좋아요.”(웃음) 결국 10권으로 시리즈를 만들게 된 것도 어린이 독자님들의 조언 덕분인 셈이에요. 각 권도 마찬가지예요. 어린이 독자님들의 조언대로 3권에서 커플 이야기를 쓰게 되었고, 남자 어린이들 종종 ‘왜 암사자가 주인공이냐’고 불만 섞인 질문을 하기도 했던 터라 6권에서 수사자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어요.
저 혼자서도 물론 열심히 공부를 했지요. 3권을 쓰기 전에 다시 세렝게티를 가려고 계획했는데, 코로나로 발이 묶였더랬어요. 그래서 결국 찾은 방법이 영어 공부였어요. 대학교 때도 안한 영어를 공부하게 된 거예요(웃음) 세렝게티에 대한 영어 자료는 무궁무진하거든요. BBC나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도 그렇고,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연구자료들도 다양해요. 한국과 달리 유럽은 아프리카 야생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보도되기도 하고요. 그렇게 3권과 4권과 5권을 쓰고, 다시 하늘길이 열린 뒤 세렝게티에 다시 갔어요. 그 뒤로도 두 번 더 갔는데, 8권 쓰기 전에 다녀온 여행이 좀 특별했어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핀다라는 사설 보호구역에서 2주 동안 자원봉사를 했어요. 그곳에서 연구 중인 동물학자를 따라 지붕도, 문도 없는 지프차를 타고 하루 종일 초원을 누볐어요. 바로 옆에서 사자들이 사냥감을 먹기도 하고, 하이에나와 사자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연구자에게 직접 듣는 동물 이야기는 또 그전과는 비할 수 없이 인상 깊었고요. 그렇게 9권을 썼고, 세렝게티와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을 다시 다녀와서 마지막 10권을 마무리하게 됐어요.
세렝게티가 가르쳐준 이야기
한 작품을 오랫동안 이어간다는 것은 처음의 마음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고, 계속 달라지는 일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긴 시간 『와니니』를 써오며 작가님 자신이 가장 많이 변한 부분은 무엇일까요?
제가 굉장히 육식을 즐겨하는 사람이었어요. 비거니즘에 대해 정치적으로는 동의하지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어요. 저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어떤 사람이었냐 하면, 언젠가 여성의 날 마라톤에서 4km만 뛴 적 있었는데요, 끝나고 같이 달린 친구들이 추어탕을 먹으러 가자는 거예요. 그조차 투덜대는 사람이 저였어요. 고기를 먹어야지, 무슨 물고기로 될 일이냐, 이랬던 거죠.(웃음)
그런데 세렝게티에서 제 안의 무언가가 달라졌어요. 아마 그 순간만의 일은 아니었겠죠. 올초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우리 강아지도, 『와니니』를 쓰면서 알 게된 모든 동물들도 저에게 조금씩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던 것 같아요. 그들을 고기가 아닌, 그냥 동물이 아닌 생명으로 보게 한 거죠. 처음 세렝게티에서 돌아와 공항철도 홍대입구역에 딱 내렸는데, 우리 사는 세상이 기이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이렇게 한 종이 독차지하고 사는 거, 괜찮나? 이렇게 한 종만 모여 사는 거, 괜찮나? 세렝게티에서는 모든 종들이 함께 살거든요. 그게 원래 지구의 모습이라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거든요. 그러고 여느 때처럼 고기로 장바구니를 채워서 집에 돌아왔는데, 그런 제 모습이 불편하게 느껴졌어요. 비거니즘에 대한 책과 다큐를 보기 시작했지요. 더 이상 고기를 먹고 싶지 않아졌어요. 생각만 아니라 입맛도 잃게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5년 정도 거의 비건으로 지내다, 지금은 페스코 베지테리언으로 살고 있어요. 이런저런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조금씩 제한을 풀었던 셈인데, 그래도 육식은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예요.
책 말미마다 남겨주신 작가의 말에는 어린이 독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빠짐없이 담겨 있습니다. 『와니니』의 이야기에서 파투(코뿔소)나 투키오(개코 원숭이)의 이야기로 잠시 카메라가 옮겨갈 때 어린이들은 어떤 반응이었을지 궁금합니다.
“왜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하나요? 와니니는요?” 강연장에 들어서자마자 항의가 들려오는 때도 많았어요.(웃음) 하지만 다행히 제 편을 들어주는 어린이들도 많았고요. 코뿔소나 개코 원숭이 이야기가 제일 재밌다고 꼽아준 어린이들도 꽤 있어요.
다큐멘터리에서는 극적인 장면만 편집해서 보여주니까 초원의 삶이 그렇게 주연과 조연이 확실한 드라마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현실은 달라요. 우리와 똑같죠. 드라마 같은 사건은 어쩌다 있는 일이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냥 일상이지요. 모두가 각자 일상의 주인공이고요. 사자나 하이에나도 매일 사냥을 하는 건 아니거든요. 2~3일에 한 번? 상황이 안 좋으면 더 오래 헤매기만 할 수도 있어요. 그러다 일단 배를 불리고 나면 세상 둘도 없이 게으른 시간을 보내요. 그럴 때는 임팔라나 얼룩말들도 경계심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사자 무리 앞을 지나가기도 해요. 배부른 맹수는 사냥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거지요. 그렇게 다 같이 사는 거예요. 그런가 하면 줄지어 내달리는 얼룩말과 누떼를 피하지 못해 사자가 목숨을 잃는 일도 있어요. 어느 동물도 주인공의 자리를 독차지 하지 않아요. 모두의 존재감이 동일한 거예요. 한마디로 공존하는 거지요. 그런 만큼 사자가 주인공인 『와니니』 이야기에도 다른 동물의 목소리를 꼭 담고 싶었어요
『와니니』 시리즈에는 경쟁이나 승리보다 관계와 공동체의 안위가 더 중요한 가치로 그려집니다. 어린이들에게 왜 이러한 메시지를 들려주고 싶으셨는지요.
사자에 대해 가장 매력 있게 느꼈던 부분은, 사자의 실제 생태와 그동안 제가 알았던 사자의 세계와 굉장히 다르다는 점이었어요. 가령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사자 이야기가 『라이온킹』인데요. 사실 『라이온킹』은 인간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사자의 모습으로 구현한 이야기죠.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에서 사자의 실제 생태가 그와 전혀 다르다는 걸 알게 됐어요. 또한 사자의 생태가 현대 인간의 주요 생태랄까요, 가부장주의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도요. 그런 사자들의 모습을 이야기로 그리고 싶었어요. 다양한 동물들의 생태를 그려내는 것으로 가부장적 질서를 비롯해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 유일한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어요.
또 하나는 사자가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이었어요. 사자는 동물의 왕이라 불리는 세렝게티의 최상위 포식자잖아요. 그걸 단적으로 말해주는 장면이, 세렝게티에서 사자랑 하이에나만 배를 다 드러내고 벌러덩 드러누워 자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살아가는 일이 더 쉽지는 않아요. 사자라고 임팔라보다 인생이 쉬운 게 아닌 거지요. 건기에 태어난 새끼 사자는 생존률이 10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고도 하는데요, 그중 대부분이 굶어서 죽는다고 해요. 포식자라는 사실이 삶을 쉽게 만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모두가 똑같이 어려움을 겪고 똑같이 용기를 내고 똑같이 행운에 기대기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와니니』를 소개할 때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라고 표현하시기도 하는데, 저는 오히려 우리 인간이야말로 그런 세계에 살고 있고, 동물들 본연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약자는 약자로서의 어려움이 있고 강자는 강자로서의 어려움이 있어요.
실패해도 괜찮다는 믿음
작가님께서는 오랫동안 어린이들을 만나 오셨습니다. 『와니니』 시리즈를 읽은 어린이들에게서 들었던 말 가운데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는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와니니』에서 어린이들이 가장 크게 공감하는 부분은, 와니니가 쓸모없는 사자라는 사실이에요. “나도 쓸모없는 아이라는 생각이 든다”, “쓸모없는 아이인 것 같아서 고민한 적이 있다”, “와니니야. 그럼에도 너는 이렇게 무리를 이루었으니 대단하다. 나도 너처럼 할 수 있을까?” 어린이들의 독후 활동을 보게 되는 일이 많았는데, 언제나 이런 마음을 볼 수 있었어요. 몹시 놀랐어요. 과보호가 문제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시대에 어째서 어린이들이 그런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의아하기도 했지요.
처음에는 미디어 때문이 아닐까 했어요. 그런 측면도 분명히 있겠지요. 어린이만 아니라 어른들 또한 미디어나 SNS로 인해 자신을 남과 비교하게 되고는 하는 시대니까요. 어린이들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 잘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자라는 일이 많지요. 하지만 좀더 생각해보니 그게 꼭 걱정할 일은 아니더라고요.
어찌 보면 잘 자라고 있는 거지요. 우리도 그렇게 자라지 않았나요? 달리기 시합에서 꼴등을 해보고, 인기 있는 친구를 부러워해보고, 칠판 앞에 나가 수학 문제를 풀다가 창피를 당해보기도 하고, 장기자랑 댄스 공연에 끼려고 했는데 오디션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왜 그런지 말이 나오지 않아서 선생님한테 오해를 사보기도 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결국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게 성장 아닐까요?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다 잘할 수는 없지요. 실패가 없는 인생은 없어요. 다들 이미 겪어보셨잖아요. 어린이에게 중요한 것은 실패하지 않는 게 아니지요. 실패를 해도 괜찮다는 걸 배우는 거지요. 1등이 아니어도, 잘나지 않아도, 주인공이 아니어도 나는 나로서 괜찮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거지요.
『와니니』를 읽는 어린이들이 대부분 10살이 지난 나이인데, 그때까지도 ‘내가 쓸모가 없는 게 아닐까’라는 의심을 한 번도 안 해봤다면 그게 과연 성장하고 있는 걸까요?
앞서 작가님께서 답변해주신 것처럼 『와니니』 시리즈에는 ‘실패해도 괜찮아’라는 메시지가 가득 담겨 있어요. 실패를 받아들이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사회에서 문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어린이의 마음이 어른의 마음과 다르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아요. 어느덧 예순이 멀지 않게 느껴지는 나이인데, 10대였을 때나 30대였을 때의 저와 지금의 제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거든요. 같은 상황에서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죠. 여전히 때로 비겁하고 때로 용감하고, 때로 치사하고, 때로 관대하죠. 그때와 다른 점은 표현 방식이겠지요.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나이에 그 앞에서 소리 내어 울어버리지는 않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나보다 시험을 잘 봐서 축하해주고 싶지만 그럼에도 실은 속이 상하지요. 그런 내가 치사하고 부끄러운데,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딘가 억울한 것도 같고… 우리도 종종 ‘내 마음을 아직도 모르겠다’ 싶을 때가 많죠.
어린이의 마음은 더욱 그럴 거 같아요. 제 마음의 이름을 모르는 일이 많을 거예요. 그러면 그냥 문 쾅 닫고 들어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것밖에 달리 어쩌겠어요? 흔한 비속어로 속 시원히 한번 내지르는 수밖에 없기도 하겠지요.
저는 어린이문학이 어린이의 마음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어린이의 마음을 말로 해설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문학을 통해 어린이들이 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또 믿어요.
그런데 요즘 학교의 상황이 정말 많이 달라져 있잖아요. 실패할 기회가 제공되지 않는 공간이 되어 가고 있듯이요. 실패를 나쁘게 인식하는 어른들이 만든 결과인데요. 지금의 어린이들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더욱 필요하다고 느끼시는지요.
어린이들의 실패를 지지하고 격려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달리기든, 축구든, 공부든, 실패는 쓰지만 낮과 밤처럼 찾아오는 일이죠. 와니니의 초원에 우기와 건기가 찾아드는 것처럼요.
어린이들도 알아요. 다 알아요. 아무리 옆에서 어른들이 네가 제일이라고 추켜 세워줘봤자 어떻게 모르겠어요? 내 짝이 나보다 축구를 잘한다는 거, 앞자리 친구의 수학 머리는 도저히 내가 따라갈 수 없다는 거, 내가 그린 만화는 친구에 비하면 낙서에 가깝다는 거, 어째서인지 나는 한 번도 친구들을 웃기지 못한다는 거, 나는 키가 작다는 거, 블랙핑크랑 하나도 안 닮았다는 거, 알아요, 다 알아요. 그래도 괜찮으려고 애쓰는 중이에요. 그런 어린이들을 믿고 격려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아이가 뒤뚱거리고 걷는 걸 보면 양육자는 마음이 조마조마하죠. 그래도 기다려줘야죠. 그래야 아이가 걷고, 뛰고, 날기도 하겠지요. 어린이문학은 그런 일이라고 생각해요. 어려운 마음의 어린이에게 다 안다고 말해주는 일,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일,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일이지요.
초원이 남긴 이름들, 그리고 다음 이야기
10권의 제목이 ‘초원으로 가는 길’이라는 데서 기존 독자분들은 어느 정도 이야기를 예상하고 읽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초원으로 돌아가다’라는 표현은 『와니니』 시리즈가 알려준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은유인데요. 이 표현은 어떻게 떠올리게 되셨는지요.
초원에는 거대한 코끼리부터 아주 작은 벌레 한 마리까지 다 똑같아요. 주어진 시간만큼 살아내고, 그런 뒤 자신을 내놓지요. 10권에도 수코끼리 한 마리를 모두 나눠 먹는 장면이 있어요. 그런 모습을 담은 거죠. 상징이나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그래요. 그렇게 누군가가 자기 시간을 다하면 다른 동물들이 그걸 먹고 다시 시간을 이어가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초원으로 돌아가다’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것 같아요. ‘죽었다’라거나 ‘세상을 떠났다’가 아니라 ‘초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와니니』 시리즈에는 정말 많은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스와힐리어로 이름을 지으셨다고 들었어요.가장 뿌듯했던, 좋았던 캐릭터가 있다면요.
제일 마음에 들었던 이름은 와니니예요. 이 이름을 짓고 나니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 뭐니뭐니해도 가장 좋아한 이름이에요. 스와힐리어가 아닌 이름도 3개정도 나온답니다. 마이샤, 조이, 가둥가. 마이샤라는 이름은 제가 후원했던 코끼리 이름이었는데, 각별한 이름인 만큼 가져와 쓰게 되었고요. 조이는 외부인이 데려온 사냥개이니 스와힐리어 이름보다는 영어 이름이 더 알맞을 것 같아 그렇게 지었어요. 가둥가는… (웃음) 저도 그 이름을 다 외우지는 못하는데요, 어린이들 중에는 물론 줄줄 외우는 독자들도 있어요. 가둥가는 얼룩말의 이름인데요. 얼룩말들은 무늬가 다 다른데, 우리가 서로 얼굴을 알아보는 것처럼, 얼룩말들은 무늬로 서로를 알아본다고 해요. 그 특징에 착안해 지은 이름이에요. 풀네임은 ‘가늘다가 불룩하게 등을 지나 둥글게 휘어지며 얼굴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콧구멍을 스쳐 가는 무늬’입니다. 이 이름을 지었을 때도 ‘이 이야기, 되겠다!’ 했지요.
가장 닮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 있으시다면요.
말라이카예요. 저도 이 친구처럼 고집은 센데, 뒷심이 부족하고, 엄청 즉흥적이고, 욱하기도 잘하고, 그걸 또 잘 잊기도 하고 그래요.(웃음)
“세렝게티의 암사자 이야기를 쓸 거야”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처음 쓰셨던 때를 떠올려주셔요. 어떻게 암사자 이야기를 쓰시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요.
언젠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린이들이 동물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동물이 나오는 동화가 별로 없구나.’ 그때부터 동물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겠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만 있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된 거예요. 그때 본 다큐멘터리로부터 『와니니』의 첫 장면인, 암사자들이 사냥하는 장면을 쓰게 됐죠. 그렇게 암사자와 10년이 넘게 동고동락하게 되었네요.(웃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암사자들을 통해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어린이 독자들이 재밌어할 것 같았어요. 저는 정말이지 암사자들에게 한눈에 반했었거든요.
그동안 다양한 어린이와 청소년의 삶을 작품으로 그려 오셨습니다. 지금 가장 마음속에서 오래 머물고 있는 다음 이야기는 어떤 모습인지요.
정말 모르겠어요. 아직 구체적으로는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동물은 아니고, 모험도 아닐 거예요.(웃음) 그럼 무엇이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 짬짬이 하고 있어요. 사실 최근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왔거든요. 그러면서 다음 책 생각도 좀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동안에는 생각 같은 걸 할 수 없더라고요(웃음) 그래도 어떤 이야기가 다가오겠지요? 그렇게 믿고 있어요. 와니니와는 다른, 와니니만큼 여러분을 즐겁게 해드릴 수 있는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도록 해볼게요. 그때까지 책들의 세상에서 기다려주세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Copyright ⓒ 채널예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