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권수빈 기자] 위기를 마주했을 때 왕이 백성을 남겨두고 도성을 이탈한 과거의 경험은 혹독한 전란을 거치며 큰 변화를 맞이했다. 국왕과 조정 중심의 피난 방식으로는 더 이상 국가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자각은 왕으로 하여금 성곽을 보강하고 지역 주민을 방어의 주체로 끌어들이는 결단으로 이어졌다. 성벽을 견고히 다지는 작업은 외침을 막는 동시에 국왕과 백성이 경계를 함께 수호하겠다는 의식의 발현이기도 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조선 후기 한양이 갖추었던 완성형 수도 방어 체계를 다각도로 조명하는 특별전 ‘여민공수 與民共守, 백성과 함께 지킨다’를 오는 14일부터 개최한다. 종로구 새문안로에 위치한 본관과 종로구 낙산성곽길의 한양도성박물관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연계 기획이다. 과거의 군사 전술적 기록을 살펴보는 본관 전시와 오늘날 현대 도시 서울 속 성곽 유산의 보존 현황과 활용을 다루는 분관 전시를 통해 서로 다른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전시 제목인 '여민공수(與民共守)'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겪은 조선 왕실이 도출해 낸 방어 체계를 압축한다. 숙종과 영조는 도성을 전면 포기하던 기존의 피난책을 폐기하고, 도성민을 국왕의 친자식과 같은 존재인 '적자(赤子)'로 규정하며 성곽 안에서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러한 기조 아래 1711년 북한산성이 가파른 산세를 따라 축성됐고, 이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사이의 방어 공백을 메우는 탕춘대성이 건설되면서 도성과 배후 산성을 연결하는 방어망이 완성됐다. 영조가 1751년 반포한 ‘수성윤음’(守城綸音)은 신분과 직역을 막론하고 유사시 한성부 백성 모두가 정해진 성첩에 올라 힘을 합쳐 성을 지켜야 한다는 구체적인 민관 합동 방어 지침을 담고 있다.
본관 전시실은 총 2부와 에필로그를 통해 조선 후기 도성 사수를 위한 실제 전략과 유물들을 연계해 보여준다. 전시관 전반에는 보물로 지정된 ‘동여도’와 ‘불랑기자포’를 비롯해 서울시 유형문화유산인 ‘북한지’, 훈련도감 조총, 금위영 관련 표지석, ‘총융청 초차제장관사강단자’ 등 군제 개편과 성곽 보강 과정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과 병서가 전시된다.
그중 ‘동여도’는 도성과 산성의 연결 관계를 세밀하게 묘사해 한양도성·북한산성·탕춘대성으로 이어지는 방어 체계를 보여준다. 겸재 정선의 ‘창의문도’와 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을 함께 그린 지도는 당시 수도 방어 체계와 한양의 공간 구조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성첩과 포루 등 화력 거점에 배치됐던 ‘불랑기자포’는 모포(母砲)에 자포(子砲)를 삽입해 연속 사격이 가능하도록 고안된 서양식 화포로, 조선 후기 도성의 방어력을 높인 무기다.
제도적 근거와 보급망의 체계성을 보여주는 기록물도 풍성하다. 영조가 반포한 ‘어제수성윤음’에는 도성 방어를 위한 ‘윤음’과 ‘수성절목’이 함께 담겨 있다. 왕이 직접 백성들에게 방어 의무와 배치 구역을 고지한 행정 문서로서 민관 공조 방어의 기틀을 명시하고 있다.
도성 수비를 맡은 삼군문의 편제 병서와 총융청 초차제장관사강단자, 금위영 관련 표지석 등은 조선 후기 군사 조직과 도성 방어 체계가 어떻게 운영됐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탕춘대 일대의 군량 창고였던 평창(平倉) 관련 기록물은 오늘날 서울 종로구 '평창동'이라는 지명이 군사적 보급 기지에서 유래했음을 짚어준다.
아울러 군영 분소와 행궁 터 등에서 출토된 유물과 북한산성의 축성과 운영을 기록한 ‘북한지’는 장기 항전을 준비하던 북한산성의 생활상과 운영 체계를 함께 보여준다.
전시장 한편에는 성벽 내부에서 외부를 조망하도록 설계된 체험 공간과 성곽 모형, 영상이 결합돼 있어 관람객이 적을 감시하는 총안(銃眼)의 기능적 원리와 성문을 보호하는 옹성,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측면 공격을 가능하게 한 치성의 군사적 효용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번 전시는 성곽을 18세기 한양의 안정과 성장을 뒷받침한 기반으로 조명한다. 성곽의 축조 과정과 방어 전략 속에는 자연 지형을 유연하게 활용한 선조들의 토목 기술과 위기 상황에서 공동체를 유지하고자 했던 역사의 기억이 내포돼 있다.
8월 중에는 어린이 대상 자율활동지 배포와 담당 학예연구사의 전시 해설 프로그램도 연계돼 제공될 예정이다.
뉴스컬처 권수빈 ppbn0101@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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