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한국 전통음악의 역사에서 임방울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임방울의 삶은 예인의 궤적을 넘어, 식민지와 전쟁, 혼란의 시기를 지나며 민중의 정서를 노래로 끌어안은 예술가의 기록이다. 무대 위에서 터져 나온 그의 한 소리는 시대의 울음이자 위로였고, 판소리의 깊이를 새롭게 드러낸 흔적이었다.
임방울은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 도산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임승근으로, 농사를 짓던 집안에서 자라며 어린 시절부터 소리와 가까이했다. 집안 어른과 친척들이 벌이던 소리판은 자연스러운 배움의 공간이었고, 이는 훗날 명창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임방울의 외숙은 조선 말기 명창 김창환이었다. 전통 예술이 구전과 계보를 통해 이어지던 시대에 그는 정통 판소리의 맥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명창들의 소리를 가까이에서 접한 경험은 그의 예술적 감각을 일찍 깨우는 계기가 됐다.
임방울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그의 예술적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린 시절 울지 않고 맑게 노는 모습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임방울의 소리를 들은 명창이 “은방울 같다”고 칭찬한 데서 비롯됐다는 견해도 전해진다. 두 이야기 모두 그의 목소리가 지닌 맑고 울림 있는 특성을 강조한다.
임방울은 어린 나이에 판소리의 길로 들어섰다. 10세 무렵 광주 송정리에서 열린 창극단 공연을 접하며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후 명창 박재실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소리를 익혔다. 어린 시절부터 무대는 배움과 도전이 공존하는 자리였다.
박재실에게 춘향가와 흥보가를 배우며 기초를 다진 그는 이후 공창식과 유성준 등 당대 명창들에게서 다양한 레퍼토리를 전수받았다. 특히 유성준에게서 배운 수궁가와 적벽가는 그의 소리 세계를 넓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장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변성기를 지나며 소리가 뜻대로 나오지 않자 임방울은 스스로를 단련하는 길을 택했다. 매형의 집 골방에 틀어박혀 소리를 갈고닦았고, 지리산 쌍계사의 토굴에서 수행하듯 연습을 이어갔다. 이러한 시간은 그만의 독창적인 창법을 완성하는 전환점이 됐다.
1929년 조선명창연주회는 임방울의 이름을 전국에 알린 무대였다. 당대 최고 명창들과 나란히 서서 ‘쑥대머리’를 부른 그는, 막힘없는 성음과 독특한 표현으로 청중을 압도했다. 이 무대는 임방울을 대중적 명창으로 끌어올린 결정적 순간이었다.
이후 전국명창대회와 라디오 방송, 음반 취입을 통해 활동 영역을 넓혔다. 특히 일본에서 녹음된 ‘쑥대머리’ 음반은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기록적인 판매량을 남겼다. 판소리가 대중문화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임방울의 소리는 서편제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는 단계면조에 능하며, 깊고 애절한 정서를 탁월하게 표현했다. 인방울의 창법은 기교를 넘어 감정을 직접 전달하는 힘을 지녔다. 청중은 그의 소리를 통해 이야기의 인물과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임방울은 전승자에 머무르지 않았다. 편곡과 작곡에도 능해 ‘호남가’와 ‘사별가’ 같은 작품을 남겼다. 이는 판소리가 고정된 형식이 아닌 살아 있는 예술임을 보여준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표현을 더하는 태도는 이후 세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혼란 속에서도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라디오 방송과 음반 활동을 이어가며 판소리를 대중과 연결했고,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임방울의 소리는 공연을 넘어 시대를 견디는 힘으로 작용했다.
전쟁 이후 일본 공연을 통해 해외 무대에도 올랐지만 건강은 점차 악화됐다. 1960년 부산 공연 중 무대에서 쓰러진 그는 이후에도 소리를 이어가려 했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소리를 놓지 않으려 했던 모습은 예술가로서의 의지를 보여준다.
1961년 세상을 떠난 임방울의 장례는 한국 국악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수많은 국악인이 모여 치른 국악예술인장은 그가 남긴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수백 명의 여류 명창들이 상여를 메고 소리를 이어간 장면은 전통예술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후에도 임방울의 이름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광주 송정공원에 세워진 기념비와 문화예술회관의 흉상은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으며, 임방울 국악제는 후배 예인들을 발굴하는 중요한 무대로 자리 잡았다. 한 예술가의 생애가 공동체의 문화 자산으로 확장된 사례다.
임방울의 예술은 기술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의 소리는 인간의 감정과 삶의 이야기를 그대로 담아냈고, 울림은 세대를 넘어 전해지고 있다. 판소리가 공동체의 기억을 담는 예술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오늘날 임방울의 이름은 도로와 행사, 기록 속에 남아 있지만 진정한 의미는 그의 소리를 통해 이어진다. 전통이 살아 숨 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계승과 재해석이 필요하며, 임방울은 그 가능성을 몸소 증명한 인물이다.
국창 임방울은 한 시대의 명창을 넘어 한국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한다. 그의 삶과 소리는 전통의 가치와 예술의 본질을 다시 떠올리게 하며, 울림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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