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급진성
철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이렇다. "이게 현실이랑 무슨 상관인데?" 때로 이 질문은 표적에서 어긋난다. 하지만 윤리학은 결코 이 질문을 회피할 수 없으며, 오히려 마지막까지 씨름해야 하는 것이 철학으로서의 윤리학과 삶의 관계일 것이다.
리처드 카니와 멜리사 피츠패트릭의 <급진적 환대: 사유에서 행위로>는 낯선 타자에 대한 환대를 사변으로 남겨두지 않고, 국경지대의 난민들, 예술, 교육 현장 등 여러 장면들을 넘나들며 구체적 삶에서의 타자와의 조우를 그려낸다. 칸트부터 리쾨르에 이르기까지의 유럽 철학과 현대의 덕윤리의 논의를 망라하면서, 저자들은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급진적 환대의 사상을 현실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여러 시도들을 소개한다.
그런데 현실과 '급진성'이라는, 언뜻 정반대에 놓여 있는 듯한 목표들을 동시에 취하는 것이 가능할까? 두 저자에게 급진성은 현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이상을 뜻하지 않는다. 혐오와 배제로 점철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환대는 우리가 도달하지 못하는 공허한 이념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급진적'(radical) 환대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 저변에 이미 근본적(radical)으로 이방인과 함께하는 삶이 있음을 알려 준다. 배제의 논리가 지금껏 이방인의 목소리를 감추어 왔던 것이라면, 환대는 오히려 무엇보다도 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에 대한 조건 없는 환대는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윤리적 호소가 아니다. 환대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이방인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직시하며 그간 듣지 못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환대는 무엇보다 '현실적'이며, <급진적 환대>의 저자들에게 환대의 작업은 타자와의 공거를 마주하여 공동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 일이다.
불가능한 환대
철학사적 계보를 따져 보자면, 저자들의 논의는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무조건적' 환대의 유형이 가지는 강점을 취하는 동시에 환대를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토대로 만들고자 그들의 논의에 다소간의 변형을 가한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조건적 환대의 유형이다. 저자들은 낯설고 새로운 이방인에 대한 환대라는 지향을 수용하되, 환대하는 주인과 환대 받는 손님이 어떻게 공동의 삶을 꾸려낼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카니는 현대 유럽 철학에 환대라는 단어를 도입한 철학자로 데리다를 꼽는다. 데리다에 따르면, 환대는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로 구분된다. 전자에서 주인은 주인으로, 손님은 손님으로 남는다면, 무조건적 환대는 "순수하고 급진적인 개방성"(p. 20)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주인이 누구에게 문을 열어 주고, 누구에게 닫을 것인가를 결정하기에 앞서 "자신의 문이 열려 있음"(p. 20)을 뜻한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다면, 그것이 메시아인지 괴물인지 묻지 않고 문을 연다."(p. 54) 이러한 환대는 "무조건적이어야 하며, 따라서 불가능해야 한다."(p. 20) 환대의 불가능성은 단순히 내가 그것을 하기 어렵다는 선택과 의지의 문제가 아니며, 주인은 손님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판단하는 '주인'의 위치를 상실해 있기에 주인으로서의 환대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해짐을 암시한다.
피츠패트릭은 레비나스적 환대의 판본을 잘 요약하는데, 그에 따르면 주체는 의식적 선택에 앞서 이미 타자에 노출되어 있다. 레비나스는 이를 의식의 능동성에 반대되는 감성에서의 수동성으로 부른다. "환대의 한 양태로서 책임은 - 의도적으로 선택된 행위나 갚아야 할 빚이 아니라 - 우리의 존재 구조에 직조되어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환대의 도덕성은 (…) 우리 존재 자체가 환대에 의해 구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p. 188) 이처럼 레비나스는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주체가 이미 처해져 있는 무조건적 환대라는 조건을 그려낸다.
저자들은 '좋은' 타자와 '나쁜' 타자를 식별한다는 미명 하에 이방인들을 조건적으로 배제하는 일에는 찬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레비나스 및 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의 유형과는 다른 길로 나아가고자 한다. 저자들의 갈림길은 의식과 대칭성의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지며, 최종적으로는 상호적 환대의 공동체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무조건적 환대에 대한 일종의 현실화를 제안한다. "낯섦을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것은 타자성의 총체적 동화를 의미하며, 그 반대는 무기력한 복종을 의미한다. 환대는 그 사이에 걸려 있다."(p. 141)
데리다와 레비나스가 타자를 변별하는 의식적 활동 일체에 반대하는 유형의 환대를 제시한다면, 커니와 피츠패트릭은 타자의 고유성을 보존하면서도 그에게 다가가기 위한 언어적 환대, 번역, 공감, 대화 등의 방안을 마련한다. 주인이 손님에게 개방되는 무조건적 환대와 달리, 환대하는 '주인'과 환대 받는 '손님' 양자가 "우리 모두 서로에게 타자"(p. 120)임을 인정하면서 소통하는 대칭적 유형의 환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에게 환대는 궁극적으로 각자의 타자성을 보유한 채로 공동적 삶에 들어서는 일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주장하는 핵심적인 요점은, 우리 각자가 어느 시점에서든 손님이자 주인의 역할을 모두 경험했다는 것이다. 환대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바로 그 구조에 내재하여 있다. 태어남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받아들여지고, 양육되고, 돌봄 받고, 손님으로 대접받는다."(p. 31)
가능한 상호의존성
저자들은 타자와의 공동적 삶이라는 넓은 지향점을 공유하며 각자의 논변과 그들이 함께 한 타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1부는 '이야기 환대'와 '육의 환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카니는 '절대적인' 타자, 즉 나와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타자라는 생각에 맞서, 타자를 '나'로 환원하지 않으면서도 그와의 유사성을 확인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사유가 자양분으로 삼는 것은 리쾨르의 번역적 모델이다. 번역이야말로 손님 언어와 주인 언어가 결코 일치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를, 곧 "주인 언어와 손님 언어를 똑같이 존중하는 언어적 환대의 중간 길"(p. 45)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타자를 배제하는 단일한 주인 언어는 환대를 통하여 복수의 언어가 되며, 이는 주인의 언어나 손님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긴장관계 속에서 제삼의 언어가 탄생함을 뜻한다.
번역을 모델로 한 환대는 단일한 서사에 맞서 타자들의 관점을 제공하는 이야기 환대, 그리고 신체적 마주침을 통하여 공감으로 나아가는 육의 환대로 구체화된다. 이야기 환대는 "타자와 관련된 삶의 이야기들을 통해 상상력과 공감 속에서 타자의 이야기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p. 60)이다. 서로에게 고통을 남긴 역사적 사건에 관하여 기억을 교환하고, 나의 적대자로 여겨졌던 이들의 이야기를 나의 것으로 번역함으로써 새로운 공감의 공동체가 탄생한다. 이는 이야기의 교환에 그치지 않고, 의식에 우선하여 타자와 접촉하는 육의 환대에 이른다. 촉각은 낯선 타자를 만지며 나 역시 타자에게 만져지는 양방향 접촉으로, "피부와 살, 신경 말단과 힘줄, 안색과 촉각의 수준에서 작동하는 예민한 감수성"(p. 133)을 길러내도록 해 준다.
2부는 칸트, 레비나스, 아렌트, 그리고 현대의 덕 윤리를 가로지르며 환대에 관한 새로운 철학적 계보를 제시한다. 데리다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조건적 환대로 비판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레비나스는 칸트의 환대론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와 타자의 관계를 보편적 이성이라는 공통성으로 환원하는 것에는 반대하였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하지만 피츠패트릭은 보편적 이성의 능동성(칸트)과 감성의 전적인 수동성(레비나스)이라는 전형적 구도에 문제를 제기하고, 보편적 인권, 자유 등의 고전적 개념들의 본뜻을 환대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환대는 전적으로 타자에 맡겨지는 수동적 감성이라기보다는, 타자를 위해 자신을 비움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의 고유함 역시 긍정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논의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데리다의 생각만큼 '조건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칸트에게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타인에 대한 환대로 나아가는 정동을 표현하며, 이성적 인간의 자유는 자기보존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낯선 자를 맞아들이는 데에 있다. 다음으로 피츠패트릭은 타자의 독특성(고유성)을 주장하는 레비나스의 감성론과 칸트의 보편적 이성을 종합하여 아렌트의 '탄생성'을 제삼의 길로 제시한다. 보편적 인권은 우리가 추상적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각자 고유하게 존재한다는 뜻에서의 '탄생성'에 기초한다.
또 고유한 타자 앞에서 스스로를 개방하여 말하고 행위하는 일은 "새로운 것을 자유롭게 탄생시키는 것"(p. 204)으로서 탄생적 환대의 정치적 영역을 이룬다. 덕 윤리의 관점에서, 이는 우정이라는 덕으로 표현된다. 나와는 다른 관점을 제공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재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우정은 계산 가능한 결과들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덕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윤리적 판단을 정제하는 과정은 주관적 자기-긍정 가능성에서 보편적 자기-긍정 가능성으로의 전환에 의해 특징지어지며, 이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가능한 한 많은 인격적 친구와의 대화이다."(p. 222)
환대를 실천하기
저자들은 철학적 논의를 넘어 낯선 이들에 대한 환대를 지금껏 타자의 목소리가 가려져 있던 우리의 '현실' 저변에서 발견하고, 또 우리의 공통적 현실로 만들고자 한다. 이들이 오갔던 현장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해보고자 한다.
커니의 '게스트북 프로젝트'는 환대와 적대가 공존하는 이방인과의 조우를 환대 쪽으로 전환하기 위하여 기획되었다. 적대와 분열 가운데 있는 이들, 가령 아일랜드의 개신교 신자와 천주교 신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한국과 일본의 청년들은 자신들이 지금껏 들어왔던 단일한 서사와는 다른 이야기를 만나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피츠패트릭은 교육계에서의 시도를 소개한다. 불쾌감을 피하기 위하여 특정한 집단에 대한 편견이 존재함을 숨기기보다는, 낯선 것에 의해 촉발되며 타자의 생각을 환대하는 '능동적 경청'이라는 소크라테스적 대화의 모델이 그것이다. 이들이 제공하는 사례들은 날이 갈수록 거세지는 극우화, 그리고 디지털 공간 상의 혐오발언에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있는 10-20대의 조건에 관하여 생각할 거리를 시사하는 듯하다.
결코 편치 않은 낯선 이들의 만남에서 오간 경험을 공유하며, <급진적 환대>는 철학이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적대와 불편함을 극복하는 사유와 행위의 훈련은, 피츠패트릭의 말처럼, "철학이 지식(episteme)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으로 남도록 보장하는 것"(p. 238)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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