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과 전분당 등 식품 원재료 산업에서는 유독 담합이 비일비재하다. 공급자는 몇 안 되고 수요처도 겹치기 때문에 타사와 경쟁하기보다 함께 가격을 올리고 내리면서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고 싶은 유혹이 크다.
정부는 시장 불공정행위에 매번 칼을 빼들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7일 대상과 삼양사, 사조씨피케이, CJ제일제당 등 전분·전분당 제조사 4곳의 가격담합을 적발하고 과징금 총 7475억7800만원을 부과하기로 했다. 공정위가 담합 사건에 부과한 과징금 중 역대 최대 규모다.
전분당뿐만 아니라 설탕도 시장에서 잦은 담합 대상이다. 전분당 담합으로 제재를 받은 삼양사와 CJ제일제당은 2007년에는 장기간 설탕 출고량 등을 합의한 행위를 한 제당 3사에 포함돼 제재받았고, 올해 2월 또 다시 설탕 가격 담합으로 과징금 총 4083억원을 부과받은 바 있다.
이들 기업이 몇 년 주기로 반복적으로 담합 행위에 연루된다는 사실은 아무리 공정위가 칼을 빼들어도 카르텔에 대한 제재가 이러한 산업 분야에서 실질적인 억제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들 기업들은 해당 산업의 구조적 특성상 담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인이 매우 커서, 법 집행에 따른 억제 효과를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에 담합을 반복적으로 저지를 수 있다.
다만 이번 전분당 담합에 대해 삼양사의 경우 공정위의 조사에 적극 응했고 재발 방지 대책을 담은 공식 사과문도 빠르게 발표했다. 이같은 삼양사의 행보에 대해 업계 일각에서는 공정위의 제재를 두고 "공식 입장문조차 내놓지 않은 일부 경쟁사와 똑같이 매를 맞는 것은 온당치 않을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모범생은 벌을 주고 우는 아이는 떡 하나 더 주는 격이 될 수 있다"는 애기다.
삼양사는 공정위 제재 직후 낸 공식 입장문에서 "그동안 시장 관행 및 거래 환경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법적 리스크를 보다 엄격하게 관리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며 "이에 따라 가격 정책과 영업활동 전반에 대한 내부 기준과 의사결정 절차를 다시 점검하고, 관련 관리 체계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이번 전분당 담합에 대한 공정위 과징금에 대해 삼양사는 검찰 리니언시 대상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리니언시는 담합 가담 기업이 자진 신고하거나 조사에 협조할 경우, 과징금 또는 형사처벌을 감면해주는 제도다. 과거 밀가루 담합 사건에서 CJ제일제당이, 설탕 담합 사건에서는 대한제당, 전분당 사건에서는 삼양사가 각각 검찰 리니언시 대상이다.
공정위가 역대 최대 규모의 과징금을 부과하면서 이들 업체는 경영상 어려움에 처할 위기다. 특히 삼양사와 사조CPK는 각각 영업이익의 3배와 6배 수준의 과징금 폭탄을 맞았다.
따라서 언뜻 '모범생'이라는 표현에 어폐가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국내 식품 원재료 시장의 구조를 뜯어보면 기업들의 볼멘 목소리도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 정부 조사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빠르게 사죄의 뜻을 밝힌 삼양사와 같은 기업과 정부 제재에도 '나몰라라' 식으로 소비자를 외면하는 행태의 기업들이 동일한 처벌을 받는 게 온당하냐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특히 이번 사태에서는 '투명성의 역설' 문제가 제기된다. 더 많은 정보를 공개하고 조사에 협조한 기업일수록 문제점이 더 많이 노출돼, 오히려 덜 투명한 조직보다 비난과 평판 손실을 더 크게 받는 현상을 말한다.
업계에서는 설탕, 전분당 등 원재료 시장에서 담합이 반복되는 이유는 단순히 기업 윤리 문제로 치부할 수 없으며 시장 구조 자체가 담합을 만들고 유지하기 쉬운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원재료 산업의 담합이 반복되는 고질적인 원인은 높은 진입장벽에 있다. 전분당의 경우만 봐도, 원료 옥수수 수입 구조와 대규모 공장 설비, 수요처와의 관계, 수입품의 한계 등이 국내 소수 기업들이 과점하는 시장의 벽을 더욱 높이고 신규 플레이어의 진입을 막는다.
OECD도 시장 집중도와 진입장벽을 카르텔 발생 가능성을 높이는 주요 요인으로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설탕이나 전분당 등 원재료는 규격화돼 있으므로 오로지 경쟁의 핵심이 가격으로 모이게 된다. 이는 과점 기업들이 가격 경쟁을 하기보다 경쟁을 피하고 공동의 시장을 형성하려는 동기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담합 행위의 근본적인 재발 방지를 위해 개별 기업을 타박하기보다, 소수 과점 구조를 공고히 하는 시스템을 혁신해야 할 것이다. 대형 수요 기업이 경쟁 견적을 통해 주기적으로 공급업체를 바꾸거나, 국내 가격이 국제 가격과 장기간 비정상적으로 괴리될 때 한시적으로 수입 경쟁을 늘리고, 실제 영업 의사결정 과정에서 경쟁사와 정보 교환이 원천 불가하도록 하는 등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시도를 한다면, 반복되는 담합의 폐해를 미연에 방지하고 개별 회사가 매번 볼멘소리를 하며 허울뿐인 대책 마련에 나서는 풍조도 개선될 것이다.
이같은 혁신을 해야 하는 이유는 불공정 행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소수 과점 기업의 횡포를 좌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개선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가령 설탕 담합에 대해 지난 4월 한 지역 명물 제과류 업체가 제당 3사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을 했고, 현재 전국 4000여개 회원사를 둔 대한제과협회가 이들 3사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집단소송을 검토하고 있는 것이 비근한 예다.
변화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게임의 잘못된 룰을 고치지 않고 플레이어들의 일탈 행위만 지적한다면, 설득력 없는 지시에 플레이어들도 지치고 게임의 결과도 산으로 가게 된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한걸음씩 나아간다면 이러한 혁신이 가능하리라는 게 업계의 바람이다.
김현정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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