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하얀 공간 위로 연한 푸른 선이 번진다. 꽃과 피아노, 악보와 빈 의자가 남긴 여백은 피아니스트 황수지의 독주회가 향하는 감각이다. 정통 클래식의 문법에 머무는 무대보다 넓은 감각을 지향한다. 쇼팽과 드뷔시, 라벨의 악보에서 출발해 FKJ와 쳇 베이커, 유재하와 우에하라 히로미까지 닿는 피아노의 넓은 반경을 펼친다.
황수지 피아노 독주회는 로샤 리사이틀 시리즈로 마련됐다. 프로그램은 프레데리크 쇼팽, 클로드 드뷔시, 에릭 사티, 프란츠 리스트, 모리스 라벨이 적힌다. 뒤에는샤를 트레네, FKJ, 왕오케이, 쳇 베이커, 유재하, 우에하라 히로미가 이어진다. 흥미로운 지점은 프로그램의 폭이다. 19세기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 프랑스 인상주의와 근대적 색채, 샹송과 재즈, 한국 대중음악, 현대적 비트 감각이 호흡한다. 황수지가 택한 레퍼토리는 한 장르의 계보만 따르지 않는다. 클래식 교육을 기반으로 성장한 연주자가 지금의 청중과 어떤 언어로 대화할 수 있는지 묻는 무대다.
쇼팽은 피아노 독주회의 가장 깊은 뿌리다. 노래하듯 휘어지는 선율, 섬세한 루바토, 손끝에서 흔들리는 화성은 건반 위에서 인간의 감정을 직접 드러낸다. 황수지의 프로그램에서 쇼팽은 낭만주의의 출발점이 된다. 드뷔시와 라벨은 색채의 문을 연다. 드뷔시의 음악은 화성의 방향보다 빛의 번짐에 가깝다. 소리는 명확한 선보다 안개처럼 퍼진다. 라벨은 정교하다. 투명한 음향, 세밀한 리듬, 프랑스 음악 특유의 감각적 균형을 요구한다. 사티는 여백의 미학을 맡는다. 적은 음으로도 분위기를 세우는 작곡가다. 느슨해 보이는 박자와 담담한 표정 속에 기묘한 고독이 있다. 넓은 음역, 화려한 손놀림, 극적 음향이 피아노를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확장한다.
후반부는 분위기를 완전히 뒤집는다. 샤를 트레네의 프랑스적 낭만, 쳇 베이커의 낮고 흐릿한 재즈 감성, 유재하의 한국적 서정은 서로 다른 도시와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FKJ와 우에하라 히로미는 지금의 감각에 가까운 이름이다. 전자는 전자음악과 재즈, 소울의 분위기를 품은 음악 세계를 대표한다. 후자는 피아노를 리듬과 즉흥의 폭발적 악기로 다루는 연주자다. 유재하의 음악은 선율과 화성이다. 선율의 섬세함, 화성의 도시적 우울, 말과 노래 사이의 자연스러운 호흡이 피아노 편곡에서 새롭게 살아날 수 있다.
스페셜 게스트로는 가야금 아티스트 조혜민이 출연한다. 피아노 독주회에 가야금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공연의 음색 지도를 넓힌다. 피아노의 타현적 소리와 가야금의 뜯는 울림은 모두 현에서 출발하지만, 발음과 여운은 크게 다르다. 건반의 직선적 타격과 가야금의 손끝 떨림이 만나면 서양 악기와 한국 악기의 대비가 한층 뚜렷해진다.
황수지는 계원예술중·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피아노과를 졸업했다. 다수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실력을 입증했다. 2025년 롯데콘서트홀 시네마 오케스트라 슈퍼콘서트 협연 무대에 섰다. 앞서 개최한 단독 독주회에서는 관객 평점 10점을 기록했다. 샌프란시스코 음악원 장학생이며, 오는 9월 미국 보스턴 컨서버토리 앳 버클리(Boston Conservatory at Berklee) 석사과정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클래식 전공 지식을 살려 재즈 연주, 콘텐츠 제작 등 다방면에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 중이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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