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전시·행사·축제·MICE 산업에서 공공입찰은 기업의 생존과 직결된다. 특히 ‘협상에 의한 계약’은 가격이 아닌 기획력과 창의성을 평가하겠다는 취지로 도입되며 해당 산업의 특성을 반영한 대표적 제도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정반대의 평가가 나온다. 기획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가 오히려 평가의 불투명성과 비합리적 구조로 인해 산업의 건강성을 해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8일 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공정성 확보를 위한 지방계약법 개선 토론회’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더 이상 일부 업계의 불만이 아닌 구조적 문제로 확대됐음을 보여준다.
■ 평가위원이 좌우하는 결과…“예측 불가능성 커졌다”
협상에 의한 계약은 기술력, 창의성, 사업 이해도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방식이다. 정량화하기 어려운 콘텐츠 산업의 특성을 반영해 가격 경쟁의 폐해를 줄이겠다는 취지로 확대돼 왔다.
실제로 공공 전시·행사 분야에서는 해당 방식이 사실상 표준처럼 자리 잡았다. 문제는 제도의 취지와 달리 평가 과정이 지나치게 ‘사람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업계에서는 “결국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제안서가 아니라 평가위원 구성”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 평가위원 선정 구조와 채점 방식에 따라 동일한 제안서도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큰 논란은 평가위원 선정과 점수 부여 방식이다. 현재 일부 공공기관에서는 평가위원을 공개 모집하거나 후보군에서 무작위 추첨하는 방식을 활용한다. 표면적으로는 공정성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지만, 업계에서는 오히려 부작용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정 업체와 사전 접촉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기 어렵고, 전문성이 검증되지 않은 인력이 평가에 참여할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점수 편차다. 일부 평가위원이 평균과 크게 벗어난 점수를 부여할 경우 전체 결과가 뒤집히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른바 ‘폭탄 점수’가 낙찰을 좌우하는 구조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정상적인 경쟁이라면 제안서의 완성도가 결과를 결정해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특정 위원의 점수 하나가 당락을 가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 “기획 대신 네트워크”…왜곡되는 경쟁 구조
이 같은 구조는 기업의 전략 자체를 바꾸고 있다. 본래라면 창의적 기획과 콘텐츠 개발에 집중해야 할 기업들이 평가위원 구성과 관련된 정보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공정성 문제를 넘어 산업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기획력 중심 산업에서 ‘보이지 않는 변수’가 결과를 좌우하게 되면 혁신 유인이 약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중소기업에게는 더욱 치명적이다. 인적 네트워크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기업일수록 불리한 구조가 고착화될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시장 진입 장벽이 높아지고 산업 생태계의 다양성도 훼손될 수 있다.
국회 토론회에서 제시된 개선안은 비교적 명확하다. 핵심은 평가 과정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데 있다.
우선 평가위원 공개모집 방식에 대한 재검토 요구가 제기됐다. 특정 업체와의 사전 교감 가능성을 차단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평가점수 실명제 도입도 주요 대안으로 꼽힌다. 평가위원이 부여한 점수에 책임을 지도록 함으로써 자의적 판단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와 함께 평가위원 수를 확대하고 전문성 검증을 강화하는 방안, 점수 편차를 일정 범위 내로 제한하는 채점 방식 도입도 논의됐다. 이는 특정 위원의 극단적 점수가 결과를 좌우하는 구조를 완화하기 위한 장치다.
■ 공정성은 ‘산업 인프라’…제도 신뢰가 경쟁력 좌우
전문가들은 공공입찰의 공정성을 절차 문제가 아닌 산업 인프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평가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기업들은 장기적인 투자 대신 단기적 대응 전략에 집중하게 되고, 이는 결국 산업 전체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MICE 산업은 국가 브랜드와도 직결되는 분야다. 국제행사 유치와 콘텐츠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라도 공정하고 예측 가능한 계약 환경이 필수적이라는 지적이다.
다만 제도 개편은 간단하지 않다. 공정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평가위원 실명제가 도입될 경우 외부 압력이나 책임 회피 문제 등이 새롭게 제기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투명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확보하면서도 평가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정교한 설계가 요구된다.
업계는 이번 논의가 선언적 수준에 머물지 않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평가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안서도 의미가 없다”며 “실력으로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공공입찰 제도의 신뢰 회복은 산업의 방향과 경쟁 구조를 바꾸는 출발점이다. 이제 남은 것은 문제를 확인하는 단계를 넘어, 실제로 바꾸는 단계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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