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AI 경쟁이 '말하는 AI'에서 '움직이는 AI'로 진화하면서 휴머노이드 로봇이 차세대 산업 패권의 핵심 무대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은 AI 플랫폼과 소프트웨어를, 중국은 압도적인 제조 생태계와 공급망을 앞세워 시장 선점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한국 역시 제조 강국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경쟁의 본질은 개별 기업이나 기술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산업 생태계 경쟁이라고 입을 모은다. 중국은 전기차 산업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은 장기 산업 전략을 휴머노이드 산업에도 적용하며 빠르게 주도권을 넓혀가고 있다. 반면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역량을 보유하고도 정책의 연속성과 실증 환경, 산업 생태계 구축에서는 여전히 과제를 안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비즈니스플러스는 2편에 걸쳐 글로벌 휴머노이드 경쟁의 현주소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산업계에선 한국이 같은 방식으로 미국·중국을 추격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진단한다. 대신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현장을 AI와 연결하는 '제조형 AI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7일 업계에 따르면 휴머노이드 초기 시장에서는 로봇의 보행 성능이나 사람과 얼마나 비슷하게 움직이는지가 핵심 경쟁력이었지만, 이제는 실제 산업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축적하고 이를 AI 성능 향상으로 연결하느냐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미국은 오픈AI와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AI 플랫폼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로봇을 실제 공장에 투입하며 생산과 학습, 양산이 동시에 이뤄지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한국 역시 제조 강국이라는 강점을 갖고 있지만 접근 방식은 달라야 한다는 것이 업계 중론이다.
가격 경쟁에서는 중국을 따라가기 어렵고, AI 플랫폼에서는 미국과 격차가 존재하는 만큼 두 나라와 같은 길을 선택해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이다.
한 수도권 소재 대학 기계공학부 교수는 "휴머노이드 산업은 사람처럼 걷는 로봇을 만드는 경쟁이 아니라 제조업의 생산성을 얼마나 높일 수 있느냐를 겨루는 산업"이라며 "자동차와 반도체, 조선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현장을 보유한 한국은 이를 AI 학습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이 같은 흐름은 분명해지고 있다. 맥킨지는 휴머노이드의 첫 번째 대규모 시장으로 자동차와 물류, 제조업을 꼽았다. 골드만삭스 역시 상용화 시기가 예상보다 빨라지고 있지만 승부는 기술보다 산업 현장에서 얼마나 빠르게 적용 사례를 늘리느냐에 달려 있다고 분석했다.
결국 AI 성능을 높이는 것은 알고리즘만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축적되는 경험 데이터라는 의미다. 생성형 AI가 인터넷 데이터를 학습하며 발전했다면 휴머노이드는 공장과 물류센터, 조선소, 건설현장에서 발생하는 작업 데이터를 먹고 성장한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기반을 갖추고 있지만 정작 이 데이터는 기업별로 흩어져 있다. 자동차는 자동차대로, 반도체는 반도체대로, 조선은 조선대로 데이터를 축적하지만 산업 전체가 활용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업계에선 앞으로 휴머노이드 경쟁력이 AI 모델보다 제조 데이터 확보 능력에서 갈릴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한 로봇업체 관계자는 "한국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공장이 많지만 데이터는 대부분 기업 내부에 갇혀 있다"며 "보안과 영업비밀을 보호하면서도 AI 학습에 활용할 수 있는 제조 데이터 활용 체계를 만드는 것이 앞으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제조 데이터를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데이터 플랫폼과 표준화 작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휴머노이드 시대에는 반도체나 배터리만큼 데이터 자체가 핵심 산업 자산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연구실이 아니라 공장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의 자동차 생산라인과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HD현대의 조선소, 포스코의 제철소는 모두 휴머노이드가 가장 먼저 투입될 것으로 예상되는 공간이다.
이들 현장은 반복 작업과 위험 공정이 많고 자동화 수준도 높아 휴머노이드가 실제 작업을 수행하며 데이터를 축적하기에 적합하다. 중요한 것은 로봇을 얼마나 많이 개발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산업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학습시키느냐다.
휴머노이드는 인터넷이 아닌 현실에서 성장하는 AI다. 작업자의 움직임과 공구 사용 방식, 물류 이동 경로, 예외 상황 대응 방식까지 모두 AI 학습 데이터가 된다.
한 대학 AI 연구소 관계자는 "지금은 수익성을 논할 단계라기보다 실제 산업 현장에서 얼마나 다양한 경험 데이터를 확보하느냐를 경쟁하는 시기"라며 "현실 데이터를 가장 많이 확보한 기업이 결국 AI 경쟁력에서도 앞서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업계에선 제조 현장을 단순한 생산시설이 아니라 'AI 학습공장'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휴머노이드 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스타트업보다 대기업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내에는 뛰어난 로봇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이 적지 않지만 제품을 검증하고 개선할 실증 기회를 확보하는 데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결국 실제 수요처가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는 중국이 지방정부와 국유기업을 통해 초기 시장을 키운 방식과는 다르다. 한국은 정부가 직접 시장을 만드는 대신 세계적 제조기업이 '첫 번째 고객'(First Buyer)이 되는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업계에서는 휴머노이드 산업의 경쟁력이 로봇 제조기업 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요기업과 부품기업, AI 기업, 스타트업이 함께 성장하는 생태계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휴머노이드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면 가장 큰 수혜를 보는 기업은 반드시 완성형 로봇 제조사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감속기와 액추에이터, 모터, 센서, AI 반도체, 카메라 모듈, 배터리 등 핵심 부품 기업이 산업 성장의 직접적인 수혜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자동차 산업이 완성차뿐 아니라 수많은 협력사를 함께 성장시켰듯 휴머노이드 역시 하나의 거대한 공급망 산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증권가에서도 같은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한국투자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휴머노이드 확산 초기에는 카메라 모듈과 비전센싱, 액추에이터, 정밀 감속기, AI 반도체 등 국내 기업들이 경쟁력을 확보한 분야의 성장 속도가 더 빠를 것으로 전망했다.
NH투자증권 역시 휴머노이드 산업은 특정 기업의 성공보다 공급망 경쟁력이 시장 지배력을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스마트팩토리와 산업 자동화 분야에서 축적한 국내 기업들의 경험이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는 평가다.
이는 한국 제조업이 상대적으로 강점을 가진 분야와도 맞닿아 있다. 세계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이미지센서와 메모리,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현대모비스는 전장 시스템,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는 배터리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정밀기계와 자동화 설비 기업까지 더하면 한국은 휴머노이드 핵심 공급망 상당 부분을 자체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업계에서는 '한국판 테슬라를 만드는 것보다 한국판 보쉬(Bosch)를 여럿 만드는 전략이 더 현실적일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특정 완성품 기업 하나에 집중하기보다 부품과 소재, 제조 솔루션 기업들이 함께 성장하는 구조가 산업 전체 경쟁력을 높인다는 의미다.
AI 경쟁에서도 한국이 미국과 같은 길을 걸을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생성형 AI 시장은 이미 글로벌 빅테크가 주도하고 있다. 막대한 컴퓨팅 자원과 데이터, 자본이 필요한 초거대 언어모델 경쟁에서 한국이 정면 승부를 벌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대신 전문가들은 제조업에 특화된 AI를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휴머노이드가 공장과 물류센터, 병원, 건설 현장에서 안정적으로 작업하려면 언어 이해 능력보다 공간 인식과 작업 계획, 힘 제어, 실시간 판단 등 피지컬 AI 역량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글로벌 로봇 기업들이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는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Robot Foundation Model)'도 같은 맥락이다. 다양한 작업 데이터를 학습한 범용 AI 모델을 기반으로 여러 종류의 로봇이 동일한 플랫폼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한국도 개별 로봇 개발보다 제조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산업 특화 AI 모델 구축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은 AI 플랫폼보다 제조 데이터를 활용한 산업형 AI에서 승부를 보는 것이 현실적"이라며 "공장과 조선소, 물류센터에서 축적되는 데이터를 공통 플랫폼으로 연결할 수 있다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휴머노이드 산업의 성패를 좌우할 마지막 변수로 정부 역할을 꼽는다. 다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연구개발(R&D) 예산 확대가 아니라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시장과 제도를 만드는 일이라는 지적이다.
중국은 지방정부가 실증사업을 지원하고 국유기업이 초기 수요를 창출하면서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기술을 검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한국이 같은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기는 어렵다. 대신 정부는 기업들이 자유롭게 기술을 시험하고 사업화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표적으로 △규제 샌드박스 확대 △휴머노이드 안전 기준 마련 △실증 테스트베드 구축 △제조 데이터 표준화 △공공조달 확대 등이 우선 과제로 거론된다.
특히 공공조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재난 대응과 국방, 공공시설 유지관리, 의료·돌봄 등 정부가 먼저 휴머노이드의 초기 수요자가 되면 민간 기업도 기술 고도화와 양산 체계를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모든 기술을 직접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증할 수 있는 시장을 만드는 것"이라며 "초기 시장이 형성되면 민간 투자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승부는 로봇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이며 결국 휴머노이드 경쟁은 특정 기업이나 특정 기술의 경쟁이 아니고 AI와 반도체, 센서, 배터리, 클라우드, 통신, 소프트웨어, 제조업이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산업 질서를 누가 먼저 구축하느냐의 경쟁"이라고 덧붙였다.
박성대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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