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무언가를 오래 좋아하는 모습을 좋아합니다. 그 마음은 쉽게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쓰는 과정은 두 장르의 비교라는 엄숙하고 짓눌린 책무보다는 들뜬 마음으로 페달을 밟는 봄날의 자전거 소풍에 가까웠다.”(16쪽) 『밤과 책: 영화 탐문』(이하 『밤과 책』)을 펴낸 김유태 기자는 지난 8년 동안 영화와 원작을 나란히 읽어온 자신의 근원이 결국 ‘애호’였음을 들려줍니다. 같은 작품을 반복해 읽고, 영화와 소설 사이를 오가며 하나의 장면을 오래 들여다볼 수 있었던 힘은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는 즐거움”이었습니다. “비교는 우열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었고, 그 발견의 기쁨을 “나누는 일”은 끝내 『밤과 책』이 되었지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엇이든 빠르게 소비합니다. AI는 순식간에 줄거리를 요약하고, 핵심을 정리하며, 그럴듯한 답까지 내놓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끝내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한 작품 앞에 오래 머무르며 스스로 질문하고, 자기만의 해석에 이르는 인간의 시간, 인간의 노력입니다. “우리야말로 해석의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잖아요. 이 책은 그런 우리의 감각을 회복하자고 손 내미는 제스처이기도 해요.” 그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오래전에 읽은 소설 한 권과 스쳐 지나간 영화 한 편을 다시 꺼내보고 싶어집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오래 머무른 사람에게만 끝내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믿어보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도착 그 이후, 다시 이름을 찾다
『나쁜 책: 금서기행』(이하 『나쁜 책』) 이후 2년 만의 신작입니다. 그사이 2024년 한강 선생님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함께 기자님의 단독 인터뷰 기사가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쏟아지는 관심 속에서 다음 책을 준비하는 과정은 어떠하셨는지요.
정말 많은 분이 한강 선생님 인터뷰 기사를 좋은 마음으로 읽어주셨어요. 저 역시 삶이라는 책을 훗날 다시 들춰볼 때 무형의 책갈피처럼 자꾸 펼쳐보게 될 시간이었고요. 선생님과 단독 인터뷰, 시상식 현장 취재를 하면서 2024년 가을과 겨울은 그렇게 떠나보내게 되었는데요. 같은 해 4월 『나쁜 책』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기에 다음 책 출간을 서두르려는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다만 늦어진 까닭은, 한강 선생님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점으로 문학기자로서, 또 한 명의 개인으로서 어떠한 ‘과정’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취재하는 데 시간과 공력이 많이 투여됐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예기치 않게 인터뷰 기사가 좋은 반응을 얻으며 분에 넘치는 주목을 받았음에도, 역설적으로 한 개인으로서는 나아가야 할 길을 완벽하게 잃은 느낌 속에서 자꾸 서성였습니다. 앞으로 이 인터뷰 기사보다 나은 기사를 쓸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렇다면 과연 지금 주어진 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혼자만의 고민에 직면하면서 다소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2024년 12월 노벨상 시상식에 다녀온 뒤 2025년 1월, 2월이 밝았음에도 여전히 2024년 13월, 14월을 살아가는 기분이었어요.
어째서 그런 본질적인 질문에 이르게 된 것일까요?
글쎄요. 한두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떤 절정을 봐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문학의 절정이 유명 문학상의 수상 자체에 있거나 유럽 혹은 미국의 '인정'에 있는 것은 아님을 알지만, 그 시상식 현장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광휘 같은 것을 목격했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같아요. 한 사람의 문학이 국경을 넘고 언어도 초월해 전 세계의 독자들의 감각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섬광 같은 순간이었을까요. 문학기자가 평생 취재하기 어려운 일을 경험했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 어쩌면 문학기자로서의 목표라거나 버킷리스트 같은 것을 이룬 셈이라 목표 상실감이 든 모양이에요.
휩쓸린 것이군요.
‘하나의 점에 다가가야 한다,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품고 살았는데 그걸 너무 빨리 봐버렸다고, 도착해버렸다고 할까요. 그렇게 현재와 미래, 현실과 나 사이의 마찰이 일어나는 것만 같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밤과 책』도 멈춰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간 덕분에 꼭 넣고 싶었던 영화와 원작에 대한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망설이는 사이에 너무 좋은 영화들, 특히 원작을 가진 영화들이 여러 편 개봉했고 원작을 찾아 읽었으니까요. 이렇게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더라면, 영화 〈햄넷〉, 〈콘클라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와 원작을 비교하는 글은 이번 책에 싣지 못했을 거예요.
『밤과 책』이라는 제목은 “일찌감치 정해졌다”고 서문에 쓰여 있습니다. 두 대상을 주인공으로 삼는 책이니만큼 제목 짓기가 까다로웠을 텐데요.
2018년 11월, 첫 연재 당시 제목은 ‘텍스크린’이었습니다. 텍스트(text)와 스크린(screen)을 결합한 저만의 조어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조악하고 유치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웃음) 이후 연재를 조금 쉬었다가 재개할 때는 ‘영화와 소설 사이’로 간명하게 지었습니다. 제목은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님이 지어주셨는데요. 『밤과 책: 두 세계 사이에서』(가제)라는 제목을 정해주셨고 2년 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엇보다 영화를 ‘밤’으로 표현하신 부분이 마음에 들었어요.
『나쁜 책』에 이어 『밤과 책』이 나오니 연속성이 느껴져요. 세 음절에 '책'으로 끝나는 제목이 시리즈를 기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책 3부작’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어요, 잠시. 약속된 다른 책이 있긴 하지만, 이런 형식의 제목으로 지어질 수 있을지 아직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원고가 대체 어떻게 맺음될는지, 얼마나 더 숙성을 해야 할는지도 막막한 상태입니다. 이 책이 과연 출간될 수 있을지, 출간된다면 언제가 될지조차 모르겠거든요.(웃음)
어떤 책인데요?
진심으로 애정하는 책에 대해 쓴 글을 모은 책이에요. 마지막 순간까지 끌어안고 싶은, 결코 바닥에 내려놓을 수 없을 책들. 신간이든 구간이든 처음 만난 책에서 어떤 강렬한 ‘찔림’ 같은 걸 느끼면 독자는 자기만의 정신적인 책장에 그 책을 꽂아두곤 하잖아요. 제게도 그런 정신적인 책장이 있습니다. 그 책장들의 목록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언젠가는요. 조금씩 써둔 몇 편의 원고도 있지만, 이를 엮게 된다면 역시나 다시 쓰고 싶어요. 그러려면 시간이 많이 들겠지요?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좋아하는 책의 목록을 줄여나가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함에도, 시간이 갈수록 그 목록이 줄기는커녕 자꾸만 늘어난다는 데 있습니다. 제 안에 이 책을 향한 기준이 명확히 서고, 어떠한 마음이 회복될 때 시작할 수 있을 텐데요. 지금으로서는 오래도록 묻어두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비교라는 자유: 영화와 소설 사이
숏폼 콘텐츠가 일상이 된 시대에 영화와 소설을 비교하며 읽어낸 이 책은, 지난 8년 동안의 작업을 담고 있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던 때와 지금을 돌아보면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도 크게 달라졌는데요. 그럼에도 문학과 영화라는 두 예술을 오래 비교하며 작업하시면서, 이 작업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게 된 이유가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저는 영화기자가 아니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한 명의 애정 넘치는 관객에 불과했어요. 오래 문학기자로 일해왔기 때문에, 마음이 끌리는 영화 원작에 관심이 갔고 영화와 원작을 함께 살펴보는 일이 진심으로 즐거웠어요. 그러다 2021년 즈음 문학기자와 함께 영화기자도 겸하게 되었습니다.
영화기자로 처음 임할 때에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종이책은 ‘죽어가는 장르’이고, 영화는 ‘살아 있는 장르’인데, 동시에 상반된 장르를 경험하게 되는구나.’ 그러나 팬데믹 시대를 지나면서 영화 역시 소멸과 무관심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죠. 극장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종이책의 죽음’을 운운하던 20세기를 지나서도 끝내 책이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영화라는 예술 역시 쉽게 사라질 것 같진 않습니다. 물론 영화 유통 채널이 변모함에 따라 영화를 보는 방식이나 소비하는 형태는 크게 달라지겠지요. 벌써 그런 변화가 대세이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해서 쇼츠 등의 영상 콘텐츠만이 살아남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러한 콘텐츠는 휘발성이 강한 즉흥적 소비 혹은 순간적 탕진에 가깝기에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이 그러했듯, 영화 역시 우리 내면에 무언가를 남기고, 생채기를 내고 질문하게 하잖아요. 숏폼 콘텐츠의 역할과 이야기, 서사를 다루는 콘텐츠는 역할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책에는 스물세 편의 글이 담겨 있습니다. 원래는 보다 많은 글이 있었고요. 어떤 기준으로 이 글들을 고르게 되셨는지요.
애초에 이 책은 100편의 글을 채우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지금까지의 원고를 다 모으니 약 70편. 이 상태만으로도 2,000쪽짜리 책이 될 터여서 어떤 담음새로 책을 만들어야 하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여러 논의 끝에 과감한 축소 작업으로 뜻이 모였고, 처음 50편에서, 그다음 30편으로 줄이고자 했습니다. 스물세 편까지 작업을 마치고 스물네 편째로 넘어가려는데, 그때 제가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편의 영화와 그 영화의 원작을 마치 추체험하듯이 경험하고 나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쳐 힘들었습니다. 그때 출판사에서 “이 책은 저자의 해석을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책이 아니고, 문학과 영화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느낀 감각을 독자분들과 나누는 책이니 이 정도 양이면 충분하다”라고 제 작업에 제동을 걸어주셨어요. 저 역시 여기까지면 충분히 담아냈다는 판단이 섰고요.
결국 이 책은 ‘얼마나 많이 담을 것인가’보다 ‘언제 멈출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비롯한 것이네요.
과거 정과리 선생님과 나눈 인터뷰가 훗날 제게도 길라잡이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책은 함부로 내서는 안 되는 물건이라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결국 저자의 입장이 되니 ‘100편’ ‘50편’ ‘2,000페이지’ 같은 수치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도 같아요. 이 생각의 어리석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면서, 인터뷰 당시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한국적 서정’이라는 환(幻)을 좇아서』라는 연구서 서문은 “오늘날의 입법자가 아닌 미래의 입법자에게 진상을 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라는 오노레 드 발자크의 말로 시작합니다. 이 대목을 인용한 까닭에 대해서는 “‘당대의 독자’가 아니라 ‘50년 후의 독자’로 상정했던 스탕달을 떠올리며 쓴 말”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분의 말씀을 생각하며, 제가 이 세상을 떠난 때에도 미지의 독자가 제 책을 꺼내 읽기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책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의도적으로 한국 영화와 원작이 빠져 있는 점이 『밤과 책』 2권 출간을 짐작하게 합니다.
『밤과 책』의 반응에 따라 2권 출간 여부가 결정되겠지만, 저로서는 언젠가는 꼭 출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의도적으로 1권에서 해외 영화만을 다룬 것이 맞거든요. 한국 영화는 따로 목록화해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현재로서는 박찬욱 감독님의 작품 중 소설을 원작 삼은 모든 영화는 초벌 작업을 끝마친 상태이고(〈공동경비구역 JSA〉와 소설 『DMZ』, 〈올드보이〉와 만화 『올드보이』, 〈박쥐〉와 소설 『테레즈 라캥』, 〈아가씨〉와 소설 『핑거스미스』, 〈어쩔수가없다〉와 『도끼』) 봉준호 감독님의 작품 일부(〈살인의 추억〉과 희곡 『날 보러 와요』, 〈설국열차〉와 그래픽노블 『설국열차』, 〈미키17〉과 소설 『미키7』)도 초벌 작업을 진행해두었어요. 이창동 감독님의 〈밀양〉과 「벌레 이야기」, 〈버닝〉과 「헛간을 태우다」 도 써두었어요. 무엇보다 한국 영화를 다루는 만큼, 독자분들께는 좀 더 친숙한 텍스트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되는 면이 있어요. 모든 작품에 해당하는 건 아니지만, 특별히 재밌게 다뤄진 부분은 상징에 관한 것이에요.
어떤 작품의 이야기인지 궁금해요.
〈밀양〉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후반부에 신애(전도연)가 과도로 손목을 긋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신애가 직전에 먹고 있던 과일에 주목하게 되었어요. 왜 사과였을까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과’의 의미가 있을 텐데요.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과는 신이 인간의 죄악을 판단하기 위해 사용한 최초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과(신의 시험지)를 만지작거리던 신애가 천장(하늘)을 쳐다보면서 손목을 긋습니다. 이 대비는 선명한 차이와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해요. 또 신애가 예배 중인 교인들을 향해 던진 돌도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질 수 있으니까요. 이렇듯 영화와 원작을 비교함으로써 생각해보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 됩니다. 제 생각은 이러하다고 찬찬히 써내렸는데, 읽어주시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무척 궁금해집니다. 2권을 쓰게 된다면 반드시 싣고 싶은 작품이 있기도 하고요.
귀띔해주신다면요.
한국 관객들이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죠? 최동훈 감독님의 〈타짜〉입니다. 이 작품을 바라볼 때, 제가 가장 흥미롭게 발견한 것은 '파랑'이라는 색이었습니다. 원작은 허영만 선생님께서 쓰신 동명의 흑백만화의 제1부 ‘지리산 작두’ 편입니다. 원작은 흑백이니 애초에 색이 존재하지 않지요. 그런데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하니 파랑이 끊임없이 눈에 들어왔어요. 고니가 정마담의 권유로 입는 코발트 블루 셔츠, 고광렬과 함께 마시는 위스키 조니 워커 블루, 평경장의 시신을 덮은 푸른 천, 심지어 정마담의 파란 속옷까지. 처음에는 아무 의미 없이 지나쳤던 장면들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제게 코발트 블루 셔츠는 고니의 ‘대관식’을 상징하는 장치로 읽혔습니다. 그러다 평경장의 죽음에 파랑이 등장할 때, 성공에서 죽음으로 그 의미가 변모하는 걸 느끼게 되었어요. 같은 색임에도 영화 안에서 그 의미가 계속 이동하는 겁니다. 이런 장면들을 따라가다 보면 고니가 화투판에서 상대하는 인물들의 배열도 새롭게 보입니다. 박무석(트라우마), 오장군(군부), 대학 교수(지성), 곽철용(폭력), 호구(자본), 아귀(순수악)를 차례로 통과하는 과정은 단순히 타짜들을 이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비틀린 위계 질서를 하나씩 해체하는 과정처럼 읽히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마담은 ‘허위’를 상징하는 인물이 아닐까 싶고요. ‘이대 나온 여자’로, ‘예림이’로 자신을 위장하니까요.
물론 이것 역시 정답이 아니고 하나의 관점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순간 때문에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고, 원작을 반복해서 읽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질서가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밤과 책』은 그런 발견의 기쁨을 독자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쓴 책입니다.(웃음)
탈주하는 영화, 탈주하는 사람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에 대한 시선을 『밤과 책』을 통해 고쳐봅니다. 원작에 못 미칠 것이라는 선입견을 거두지 못하기 때문인데요. 인물의 선택, 이야기의 결말, 작디작은 변주들이 영화가 시도하는 “탈주(13쪽)”라고 하니 관대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 책을 통해 나누고 싶으셨던 탈주극은 무엇이었나요?
『밤과 책』에서 소개하는 작품들에는 원칙이 하나 있는데, 원작의 성취에 비견할 만한 성취에 이룩한 영화들을 선택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범주 안에서 영화를 골라야 독자분들께서도 이 작품들에 대한 글을 읽는 것이 가능하시리라 여겼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까닭은 작품 선정에 대한 동의가 어려우면, 제가 느낀 감각을 공유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한 문장 나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소설이든 희곡이든 영화 제작자가 판권을 구매하면, 그 작품의 영상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주는 오로지 제작사 측의 권한이 됩니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영화는 많은 부분을 원작에 기댈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이 원작이 있는 작품의 한계이자 특징일 테지요. 그런 차원에서 결말의 변주라는 선택은 꽤 과감한 탈주극인데요.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 〈클로저〉와 〈패왕별희〉 등이 그러한 작품에 해당합니다. 이 작품의 비교를 다룬 글들을 독자분들께 꼭 건네고 싶어요.
책에 대한 애정은 언제부터 비롯한 것인지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잠시 꺼내볼게요. 책에 관한 제 삶의 중요한 장면은 고교 시절의 도서관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야간자율학습이 의무여서 모두가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아야 했는데, 공식적인 예외 조건이 딱 한 가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공립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었지요. 저는 그렇게 학교를 빠져나와 도서관 열람실에 가방을 던져놓고는 800번대 서가로 곧장 향하곤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800번대 서가는 문학 코너잖아요?(웃음) 그 공립 도서관은 오래된 곳이었던 만큼 나무 책장 색이 심하게 바래 있었고, 책도 대부분 오래된 판본으로 이뤄져 있었어요. 책장과 책장 사이에 대충 앉아서 ‘너머의 세계’를 목격하는 순간이 안온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떤 섬광 같은 교훈을 주거나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는 책도 좋은 책이지만, 정말 좋은 책이란 독자가 ‘나도 이런 책(글)을 써보고 싶다’라는 근원적인 욕망을 품게 만드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그때 그런 책을 만나면서 책에 대한 애정을 품게 되었어요. 전공도 현대시였는데 아마 그때 제가 매혹된 글이 시였기 때문이었어요. 아마 그때 소설에 끌렸다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기자, 작가, 시인.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이름이 많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여러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기자님께서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마음을 두고 계시는지요.
무엇보다 ‘시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다소 꺼려집니다. 시인은 하나의 정체성이 아니라 ‘쓰는 상태’일 때만 시인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쓰지 않는 상태인 지금의 저는 시인이라기엔 부적절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라는 호칭도 어색하게 느껴져요. 다만 ‘기자’라는 이름은 올해까지 햇수로 17년 동안 생업으로 삼아온 만큼 거부감이 없게 들립니다.
때로 저 역시 제가 누군지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지나온 길을 생각해보면 자꾸 ‘도망치는’ 인간이었던 것 같기는 해요. 한 울타리에 갇힐 것 같으면 옆 울타리 너머로 도주하고, 또 그 공간에 흡수되기 전에 다시 울타리를 넘고… 경계에 있을 용기는 없으면서 주어진 자리에서는 도망치려 애쓰는 사람이었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로맹 가리를 몹시 존경합니다. 공쿠르상을 두 번 수상한 유일한 작가, 동시에 영화감독이었고, 전쟁 영웅이면서 동시에 외교관이기도 했던 그 난수표 같은 삶. 저는 감히 로맹 가리에 근접할 수도 없는 존재지만, 그의 삶처럼 자신을 확장하고 초월하는 인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로맹 가리의 “나는 온전히 나를 표현했다”는 말을 어떤 좌우명처럼 품고 있습니다.
‘해석’하는 인간다움
콘텐츠를 대하는 마음에 대해 여쭙습니다. AI가 요약한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대 속에서 기사라는 콘텐츠를 매일같이 생산하는 것은 어떠한 가치로 느끼시는지요.
마침 어제 읽은 책이 나오미 배런의 『읽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AI가 인간의 고유한 능력인 ‘읽기’와 ‘쓰기’를 잠식해간다는 내용이었어요. 이 책은 AI가 요약해주는 줄거리만으론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기 어렵고 감정의 고저를 체감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저 역시 깊이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도구’로서의 AI를 이용하는 것과 AI에 사유 자체를 맡기는 일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거든요.
이 책을 쓰면서 저는 AI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특히 검색과 ‘팩트 확인’을 위한 사전 조사를 위해 사용했는데, 영화 관련 정보를 요구하면 AI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헤매는 일이 많았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앤턴 시거가 차를 몰고 가다가 갑자기 속도를 줄이면서 난간에 있는 독수리를 총으로 죽이려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그 장면에 대해 AI에게 질문했어요. 그 새가 독수리가 맞느냐고요. 그런데 AI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장면 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확실하게 알았어요. ‘AI는 인간의 감식안에 도달할 수 없구나.’ 왜냐하면 AI는 인간이 사용하는 것을 학습하고 그것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거잖아요. 영화의 경우, 특정한 장면에 대해 해석한 사람이 없다면, 혹은 그 영화에 대한 글이 없다면, AI는 학습한 적이 없으니 정확한 답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이죠. 그걸 알고 나서는 AI에게 물어봐서는 안 되는 문제가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됐어요. 그러니 궁금하면, 직접 영화를 돌려보면서, 원작을 반복해 읽음으로써 찾는 수밖에 없어요.
AI는 끝내 이러한 한계에 머무를 것 같아요. 인간만이 볼 수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거든요.
감히 『밤과 책』은 반(反) AI적인 책이라고 자평하고 싶습니다.(웃음) 제가 영화를 보고 소설과 희곡을 읽으면서 발견한 차이는 AI의 감각으로 발견할 수 없는 내용들이고, LLM(Large Language Model)이 ‘문자 언어’에 기반한 모델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영상 언어’로 이뤄진 영화 등의 시각화된 정보를 온전히 체득하긴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런 한계를 알고 AI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AI를 일종의 ‘연장통’처럼 취급하고 있어요. 그런데 연장통 속의 연장이 우리가 만들어가는 대상 그 자체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AI는 일종의 그림자(인간의 그림자)이자 (인간을 반영한) 거울 아닐까요? 언젠가 AI가 그림자가 아니게 되는, 거울에 반영된 무엇이 아닌 순간이 오기도 하겠지만, 그런 책은 결코 감동을 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처음 보는 것을 여러 번 머뭇거리며 볼 때 우리는 익숙함과 낯섦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때 마주하는 것은 본질”(7쪽)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영화와 소설을 읽는 것은 ‘자유’를 얻기 위함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 책이 영화 평론이나 영화 비평의 측면에서 읽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비교’의 측면에서 이 책이 독자분들께 다가가기를 소망합니다. 차이는 비교로부터 옵니다. 비교하는 행위는 관객과 독자에게 자유를 준다고 생각해요. 소설과 영화를 각각 문학의 집과 영화의 집으로 은유해볼게요. 두 공간은 같아 보이면서도 서로 다른 복도가 구성돼 있고 나가는 출구가 다르기도 합니다. 문학의 집과 다른 영화의 집을 바라보면서, 서로 다름을 인지할 때 우리가 하나의 집에만 갇히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또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존재는 신(神)이겠지요. 소설이든 영화든 그 세계를 만들어낸 작가나 감독은 일종의 창조주 즉, 신으로 비유되곤 하잖아요. 그렇다면 문학의 집에서 영화의 집으로 장르가 변할 때 ‘두 번째 신(감독)’은 자기만의 변주를 의도할 수 있을 테지요. 관객이 그 창조주가 무엇을 변주했는지, 또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상상할 때 그것은 가장 자유로운 존재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을 내릴 수 있게 되고, 이는 곧 자유의 다른 말이 됩니다. 이 책에 담은 스물세 편의 영화와 원작의 변화상이나 의미 그 자체가 아니라 비교함으로써 차이를 발견해내는 순간의 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 작품마다 비교하면서 내린 해석은 정답이 아니라 그 감각을 공유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같은 내용의 작품을 반복해 읽고, 보고, 비교하는 일련의 과정은 사실 굉장히 품이 많이 들기에 쉽게 지치는 작업이 될 공산이 큽니다. 대개는 이런 일을 힘들어하죠.
예전에 배우 김혜자 선생님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분께서 들려주신 삶의 잠언 같은 말씀 중에 가장 제 심부를 찔렀던 말은 ‘몰입’이라는 단어였어요. 그분이 크리스천이시잖아요. 그 입장에서 들려주신 이야기인데요. “거저 얻을 수 있는 건 없어요. 저 자신을 잊고 몰입할 때 제 연기가 가장 좋았고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어요. 젊은 시절엔 어떤 것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반쯤 몽유병자처럼 살던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신은 내가 몰입할 수 있도록 새 작품들을 계속 앞에 가져다 주셨어요.” 연기자로서 살아오신 그분께 몰입의 기쁨은 그러한 것인데, 저는 독자 혹은 관객으로서 작품 감상에 몰입하는 일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저 역시 요약본이나 쇼츠도 보곤 해요. 그런데 즐기게 되진 않더라고요. 해석의 감식안이 아쉽다고 해야 할까요? 미진한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많으니 신뢰가 가지 않아요. 벌써부터 기계나 기술에 의존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우리야말로 해석의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잖아요. 이 책은 그런 우리의 감각을 회복하자고 손 내미는 제스처이기도 해요.
김혜자 선생님께서는 “연기란 무엇이었습니까”라는 질문에 이런 답을 들려주시기도 했는데요. “제 영혼이 죽어서 제가 살아온 생을 돌아볼 수 있다면, 어두운 소극장 구석에 앉아 작품을 한 편씩 돌려보고 싶어요. 제게 연기는 그런 거예요.” 제가 쓰는 책도, 기사도, 시도 모두 훗날 생의 마지막 순간에 제가 다시 확인하고 싶은 텍스트들입니다. 각자의 삶은 한 권의 책과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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