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뉴스1의 2011년 사진에서 이 회장의 모습만 따로 딴 것이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생전에 늘 미래를 말했다. 그것도 눈앞의 1, 2년 후가 아니라 10년, 혹은 그 이상의 먼 미래를 내다보고 화두를 던지곤 했다. 이 회장이 제시한 청사진은 당대의 상식으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 많아 당시 주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지만, 세월이 흘러 예외 없이 모두 현실로 이뤄졌다. 아날로그 강자였던 일본을 넘어 디지털 강국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 IT 산업의 바탕에는 시대를 앞서간 이 회장의 날카로운 통찰과 결단이 있었다. 시대를 앞서간 이 회장의 혜안에 대해 알아봤다.
진공관 텔레비전 시절에 던진 ‘반도체’ 화두
이 회장이 삼성의 미래 먹거리로 반도체를 점찍고 독자적인 행보를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은 여전히 진공관이나 브라운관을 사용하는 텔레비전을 조립·생산하는 수준의 가전 변방국에 불과했다. 첨단 정밀 기술의 집약체인 반도체는 미국과 일본 등 일부 선진국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1974년 한국반도체 파산 소식을 접한 이 회장은 이병철 선대회장에게 반도체 사업의 필요성을 강력히 건의했으나, 당시 삼성 경영진을 비롯한 대다수의 전문가는 사활을 건 모험이라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에 이 회장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하는 결단을 내렸다.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 취임할 무렵에도 반도체를 향한 이 회장의 집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막대한 투자 예산과 기술적 한계 앞에서 안팎의 우려가 쏟아졌지만, 이 회장은 반도체가 향후 모든 산업의 쌀이 될 것임을 확신하고 라인 증설과 기술 개발을 밀어붙였다. 이는 훗날 삼성을 세계 메모리 반도체 1위 기업으로 도약시키는 결정적인 초석이 됐다.
“1인당 휴대전화 1대 시대 온다” 상용화 전 선점 지시
휴대전화 사업 역시 이 회장의 10년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빛을 발한 분야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무선통신기기는 일부 특수 계층이나 비즈니스맨들만 사용하는 고가의 사치품에 불과했다. 일반 대중에게는 유선 전화와 삐삐(무선호출기)가 상용화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 회장은 무선 통신 기술의 발전 속도와 사회적 변화를 읽어내고 아직 휴대전화가 대중적으로 상용화되기 전부터 전 임직원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이 회장은 “머지않은 미래에 1인당 휴대전화를 1대씩 소유하는 시대가 반드시 온다”라며 거대한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무선전화기 기술 개발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것을 주문했다. 대중성을 의심하던 이들의 우려와 달리, 삼성이 개발한 ‘애니콜’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국내 시장을 장악했고, 현재의 ‘갤럭시’ 스마트폰 신화로 이어지는 통신 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아날로그는 일본을 못 이기지만, 디지털로는 앞선다”
이 회장의 예언 중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당시 사람들을 가장 의아하게 만들었던 대목은 바로 ‘디지털 패러다임 시프트’에 대한 선언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전 세계 가전 시장은 소니, 도시바, 파나소닉 등 일본 기업들이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수십 년에서 100년 가까이 축적된 일본의 정밀 기계 공학 기술과 아날로그 노하우는 후발 주자인 한국 기업이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보였다.
이 지점에서 이 회장은 패러다임의 거대한 전환을 포착했다. 이 회장은 “아날로그 시대에는 오랜 시간 기술을 축적한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지만 모든 데이터가 0과 1로 처리되는 디지털 시대에는 출발선이 같기 때문에 우리가 일본을 앞서갈 수 있다”라는 논리를 폈다. 당시 현장 엔지니어들과 경영진은 기술력의 격차를 실감하고 있었기에 이 회장의 이러한 발언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장이 브라운관에서 LCD 및 디지털 TV로 급격하게 재편되면서 판도는 완전히 뒤집혔다. 삼성이 아날로그 가전의 절대강자였던 소니를 제치고 글로벌 TV 시장 1위로 올라선 순간은 이 회장의 통찰이 정확히 맞아떨어졌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10년 뒤의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고뇌한 경영자
이 회장은 언제나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는 것을 경계했다.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던 호황기에도 이 회장은 “지금이 진짜 위기다. 삼성을 대표하는 제품들이 10년 뒤에는 모두 사라질 수 있다”라며 끊임없이 위기의식을 불어넣었다. 남들이 현재의 성과를 자축할 때 홀로 10년 뒤의 미래 사회 구조와 기술 지형을 고민했던 고독한 결단이 오늘날의 전 세계 IT 시장을 선도하는 삼성을 만든 원동력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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