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금융신문 정경환 기자] 정부가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 프로젝트'를 내세우며 국가의 미래 먹거리 발굴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프로젝트는 ‘반도체’와 ‘피지컬 AI’ 그리고 ‘AI 데이터센터’를 삼각축으로 삼고 정부와 민간의 역량을 모으겠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성장축으로 충분히 공감할 만한 산업이고, 또 방향입니다.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AI)과 첨단산업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데 이견을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한 마디 보탤 말이 없진 않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끝에선 소외된 이들의 씁쓸함이 따라오곤 합니다. 이번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지금껏 대한민국 미래산업을 논할 때 찾아보기 힘든 '유통'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유통은 늘 정부 정책의 최전선에 서있습니다. 경기가 나쁘면 소비를 살려야 한다며 할인행사를 요청받고, 물가가 오르면 가격 인상을 자제해 달라는 협조 부담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명절이면 장바구니 물가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소비쿠폰과 지역화폐 같은 내수 진작 정책도 결국 유통망을 통해 시장으로 전달됩니다. 정부가 민생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찾는 산업이 유통인 것이죠.
하지만 미래를 이야기할 때 유통은 사라집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유통을 '물건을 사고파는 산업' 정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제조가 가치를 만들고 유통은 이를 전달하는 역할이라는 오래된 관점이 정책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곤 합니다. 그저 물가 관리 수단으로 바라보는 것이죠. 그러나 세계 유통산업은 이미 그 단계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오늘날 유통은 AI, 빅데이터, 로봇이 집약된 첨단산업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소비자의 수요를 가장 먼저 읽고, 생산을 예측하며, 공급망을 최적화하는 산업이죠. 미국의 유통기업이나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이 기술기업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선, 글로벌 유통기업들의 경쟁력은 매장의 규모보다 데이터의 규모에서 나옵니다. 소비자가 무엇을 검색했고, 어떤 상품 앞에서 머물렀으며, 무엇을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다시 내려놓았는지까지 모든 것이 데이터로 남습니다. AI는 그 데이터를 학습해 수요를 예측하고, 재고를 관리하며, 개인별 상품을 추천하기에 이릅니다. 물류센터에서는 로봇이 상품을 분류하고, 배송 동선을 계산하며, 자동화 설비가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이제 유통은 데이터를 가장 많이 생산하고 가장 빨리 활용하는 산업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정부가 강조하는 피지컬 AI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피지컬 AI라 하면 스마트팩토리나 제조로봇을 떠올릴 것입니다. 물론 그도 중요한 분야입니다. 하지만 피지컬 AI가 가장 빠르게 상용화될 현장은 공장만이 아닙니다. 대형 물류센터와 도심형 풀필먼트센터, 자동화 창고와 배송 시스템이야말로 AI와 로봇이 가장 치열하게 경쟁력을 겨루는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로봇이 선반을 움직이고, AI가 주문을 분석하며, 자동화 설비가 실시간으로 배송을 준비하는 모습은 더 이상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AI 데이터센터도 같은 맥락입니다. 데이터센터는 데이터를 저장하고 학습시키기 위한 기반시설입니다. 그렇다면 그 데이터를 가장 많이 만들어내는 산업은 어디일까요. 제조업도 중요하지만 소비자의 행동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축적되는 곳은 유통이 아닐까요. 검색과 구매, 결제와 배송, 재구매와 반품까지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데이터가 유통 현장에서 생성됩니다. 반도체가 AI의 두뇌라면 데이터센터는 기억장치이고, 유통은 AI를 학습시키는 거대한 교실이라고 해도 지나치진 않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통은 AI를 단순히 활용하는 데 그치는 산업이 아닌 것 같습니다. AI의 성능을 실제 시장에서 검증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은 결국 소비자와 만날 때 비로소 산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도체가 아무리 만들어져도, 데이터센터가 아무리 늘어나도, 국민이 체감하는 AI 혁신은 결국 쇼핑과 물류, 결제와 배송 같은 일상의 서비스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AI 모델도 고객의 구매를 예측하지 못하고, 물류 효율을 높이지 못하며, 소비 경험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산업적 가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AI가 생활 속 기술이 되는 마지막 단계가 바로 유통인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책은 여전히 유통을 물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데 익숙합니다. 물론 생활물가 안정은 정부의 중요한 책무입니다. 특히 고물가와 경기 둔화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장바구니 부담을 덜어주는 일은 결코 가벼이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유통을 물가 관리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순간, 산업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죠.
가격을 억누르는 정책은 단기적으로 소비자의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담은 결국 납품업체와 협력사로 전가되거나, 투자 및 혁신 동력을 위축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보다 나은 기술 개발에 투입돼야 할 자원이 비용 절감 구호 속에 녹아내린다면 대한민국 산업의 미래 경쟁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글로벌 플랫폼과 경쟁해야 하는 국내 유통기업들이 혁신보다 가격 관리에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 우리 현실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아 보입니다.
정부가 내세운 대도약 메가 프로젝트는 분명 중요하고도 필요한 국가 전략입니다. 반도체와 피지컬 AI 그리고 AI 데이터센터, 이들이 국가 경제의 미래를 짊어질 대들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대들보를 튼튼히 세우겠다는 국가적 과제가 연구와 제조 단계에만 머문다면 절반의 성공에 그칠 수 있습니다. 기술은 시장에서 완성되고, 시장은 유통을 통해 움직입니다. 반도체를 만드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내며 산업으로 자리잡는 생태계를 구축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제는 유통을 장바구니 물가를 관리하는 산업이 아니라, AI 시대에 혁신이 집약되는 전략 산업으로 다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미래산업’이 꼭 공장에서만 태어나란 법은 없지 싶습니다.
정경환 한국금융신문 기자 hoan@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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