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루미늄과 구리, 에나멜과 볏짚, 정원용 호스까지. 산업과 일상 소재를 넘나들며 직조와 매듭, 칠보 에나멜링 같은 전통 기법으로 옮겨온 작가 이광호. 엮고 짜는 행위에 몰두해 온 지 올해로 20년이 된 그가 이번에는 가죽을 손에 잡았다. 보테가 베네타와의 세 번째 협업이자 산탄드리아 밀란 매장을 위해 완성한 설치미술 작품 ‘라이트풀(Lightful)’로 매장 공간 전체를 새롭게 연출했다. 인터뷰는 매장 설치를 마친 직후, 아직 현장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밀란에서 이뤄졌다.
보테가 베네타와 세 번째 협업입니다. 이번 협업은 어떻게 달랐나요
럭셔리 브랜드임에도 한 명의 작가에게 여러 번의 협업을 제안한다는 사실이 저도 신기합니다. 지난해 보테가 베네타의 아틀리에에 다녀온 이후 이 협업에 확신이 생겼어요. 제가 작업하며 추구해 온 가치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죠. 보테가 베네타 아틀리에에선 가방 하나를 장인 한 명이 본인의 작업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만듭니다. 공정을 나누지 않죠. 그 장면이 저에게 강렬하게 다가왔어요. 저 역시 과정이 곧 결과라고 생각하거든요.
산탄드리아 밀란 매장에 설치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쇼룸이 문을 닫은 시간을 활용해 단 이틀간 설치한 뒤 바로 오픈했다죠
현장 설치는 렌더링 작업만으로 모두 준비되지는 않아요. 어떤 공간에서 사람의 눈은 렌더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차원 이상의 것을 봅니다. 구석구석의 요소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게 되죠. 현장에서 우리는 그 모든 시선을 생각하고, 제품이 걸린 방향도 보고, 공간을 느끼면서 짧은 시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문제는 시간이에요. 오프닝 당일 새벽 4시쯤 신기하게도 서로 의견과 호흡이 맞아떨어져 속도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짜릿했죠. 설치를 모두 마치니 해가 뜨기 시작했어요. 매장 뒤편에 정원이 있는데, 그 풍경과 저희 작업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드디어 본 거죠. 정말 예뻤습니다. 새소리도 들리고… 꿈같았어요.
협업 작품 ‘라이트풀(Lightful)’은 매듭 기법으로 완성한 조명 오브제입니다. 어떤 의미를 담았나요
서로를 조명한다는 것,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결국 협업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전형적인 조명 오브제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요. 저는 보테가 베네타의 가치를 이해하고, 루이스가 하는 것에 관해서도 충분히 들었어요. 다만 그걸 어떻게 드러내는가를 결정하는 게 제 역할이었죠. 루이스는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행위를 적극적으로, 자신 있게 드러내는 걸 좋아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도 그 방향으로 접근했어요.
공감되는 부분이에요. 이번 작업은 특히 짜는 ‘행위’를 펼쳐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같은 방식으로 계속 짜임 작업을 하지만, 매번 다른 걸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보테가 베네타와의 작업에서도 이광호가 성장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전적으로 이 공간에 저를 옮겨두고, 공간과 교감하는 일이 제 작업의 가장 큰 요소죠. 저 혼자만의 시선으로 완성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스튜디오 스태프에게 물어보고, 보테가 베네타 팀의 의견도 많이 따랐어요.
밧줄과 호스 등을 비롯해 지금껏 매우 다양한 재료를 작업에 사용해 왔습니다. 이번 협업에 쓴 가죽은 당신에게 어떤 재료인가요
재료마다 난이도가 다릅니다. 가죽은 쉬운 재료예요. 부드럽고 찰져서 기분 좋게, 알맞게 짤 수 있습니다. 호스 같은 건 진짜 힘들죠. 굵기 자체도 그렇고, 재료의 강도가 세서 꼬거나 짤 때 반항하는 힘이 큽니다. 반면 가죽은 한번 짜면 서로 딱 달라붙어 있습니다. 냄새도 좋죠. 산업 재료들은 특유의 석유 냄새가 나거든요. 가죽은 감각적으로 참 기분 좋은 재료예요.
보테가 베네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루이스 트로터와의 교감은 어땠나요
오프닝 이벤트를 마친 뒤 마련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루이스는 자신이 처음 보테가 베네타 작업을 시작할 때 제 작업이 큰 영감을 줬다고 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칭찬이었고, 그의 창의성에 제가 일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감동했어요. 내일 아침 밀란에서 루이스의 남편과 테니스를 하기로 했습니다. 루이스가 테니스를 좋아하더군요. 예측할 수 없고, 노력한다고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인의 작업과 비슷하다고 했어요. 제 딸아이가 테니스 선수이기도 하고, 저도 배운 적 있어 맞장구를 치다 보니 “우리 남편이랑 한 게임 할래?” 이렇게 된 거예요(웃음).
작가로서 엮고 짜는 작업을 시작한 지 올해로 20년째입니다. 여전히 이 작업의 가능성이 느껴지나요
흔들린 적도 있었어요. “계속 짤 거냐? 이렇게 똑같이 짜기만 할 거냐?”는 질문도 받았죠.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사람들에게 지루하게 느껴지나 싶었어요. 하지만 제겐 아이와 가족이 있으니까. 이왕 한 김에 끝까지 해보자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어요. 그때 흔들리지 않고 쭉 짜온 게 다행이에요. 같은 방식의 작업을 이토록 오래 해온 게 결국 누군가에게 제 시간을 인정받은 거잖아요.
오랫동안 작업을 지속해 온 힘은 무엇일까요
결국 호기심이에요. 반복 작업이 만들어내는 순수한 탐구심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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