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충남 당진의 한적한 시골길 끝, 별다른 간판도 울타리도 없이 열려 있는 한 채의 오래된 집이 시선을 붙잡는다.
100년 세월을 견뎌낸 고택은 낡고 고요한 공간이 아니라, 사계절 내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살아 있는 정원’으로 다시 태어나 있다. 길을 걷던 이들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분홍빛 낮달맞이꽃과 붉은 양귀비가 뒤섞인 풍경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게 된다.
■ 담장 없는 100년 집, 꽃이 먼저 사람을 맞이하다
이 집은 이제 특정한 누구의 것이라기보다, 누구에게나 잠시 머물 수 있는 작은 쉼의 공간처럼 기능하고 있다. 문이 닫혀 있지 않은 집 안으로 들어서면, 세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서까래와 아궁이, 대청마루가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품고 있다. 오래된 시간 위에 꽃의 온기가 더해지며, 이곳은 주거 공간을 넘어 마을의 풍경 자체를 바꾸는 중심이 됐다.
집의 주인은 이해순 씨와 손영남 씨 부부다. 평범한 농촌 부부처럼 보이지만, 이 공간에는 한 가족의 선택과 시간, 그리고 감정이 층층이 쌓여 있다. 집을 고치고, 꽃을 심고, 문을 열어둔 모든 결정들이 결국 이 집을 ‘꽃대궐’로 만들었다.
■ 어머니를 위해 다시 세운 집, 그리고 너무 짧았던 작별
이 집의 시작은 화려한 계획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손영남 씨는 치매를 앓던 친정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무너져가던 고향집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로 결심했다. 남편 이해순 씨는 그 선택에 함께했고, 노후를 위해 마련해둔 땅까지 내어주며 2년에 걸쳐 집을 직접 고쳐 나갔다. 그렇게 완성된 공간은 가족의 시간을 다시 붙잡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하지만 그 끝은 예상보다 훨씬 짧았다. 집이 완성된 지 불과 보름 만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그 공간은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머무는 아이러니한 장소로 남게 됐다. 기쁘게 모시기 위해 만든 집에서 마지막을 함께하게 된 현실은 부부에게 큰 상실감을 남겼고, 한동안 그 집은 말 그대로 멈춘 듯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공간은 또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집을 지우는 대신, 그 기억을 살리는 방향으로 마음이 움직였고, 결국 이 집은 ‘슬픔을 닫는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를 맞이하는 공간’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 꽃이 남긴 치유, 마을까지 번져간 변화
어머니를 기리며 하나씩 심은 집 마당에 심어진 꽃들은 계절을 거듭하면서 번지기 시작했고, 그 풍경을 보기 위해 낯선 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용히 스쳐 가던 방문객들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 집은 자연스럽게 마을의 작은 명소처럼 자리 잡았다.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손영남 씨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겼다. 상실로 닫혀 있던 감정은 꽃을 돌보고 사람을 맞이하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풀려나갔고,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집에만 머무르던 꽃의 의미를 마을 전체로 확장해보기로 한다.
그 결정 이후 시작된 것이 마을 꽃 심기였다. 산소 주변과 마을 길목마다 꽃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4년이 흐른 지금은 조용하던 시골 마을 전체가 색으로 살아나는 공간이 됐다. 웃음과 발걸음이 다시 돌아오며, 이 작은 시골은 이전과 전혀 다른 풍경을 갖게 되었다.
■ 나눔으로 확장된 삶, 자두가 만든 12개의 우물
부부의 삶은 집과 마을을 넘어 더 넓은 방향으로 확장됐다. 이해순 씨는 이웃의 농기계를 손보며 필요한 곳에 손을 보태는 일을 자연스럽게 이어갔고, 손영남 씨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공간과 마음을 내어주며 ‘머무를 수 있는 집’을 지켜왔다. 두 사람의 일상은 거창한 봉사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이어지는 작은 도움들로 채워져 있었다.
더 놀라운 변화는 수입의 사용 방식에서 드러났다. 유일한 소득원이었던 자두 판매 수익은 부부의 선택을 통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돈은 해외로 이어졌고, 아프리카 지역에 우물을 파는 데 쓰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둘 완성된 우물은 어느새 12개에 이르렀다.
가진 것을 쌓아두는 대신 나누는 선택은 부부의 삶을 완전히 다른 궤도로 이끌었다. 물질적 풍요보다 마음의 충만함을 더 크게 느끼게 된 이들은, 나눔이 곧 삶을 더 깊게 만드는 방식임을 몸소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 흔들리는 평온, 다시 시험대에 오른 부부의 시간
모든 것이 안정된 듯 보이던 시간에도 균열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이해순 씨가 무거운 작업을 반복해오며 허리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영남 씨는 일을 줄이길 권했지만 남편의 선택은 달랐다. 오랜 시간 함께 쌓아온 방식과 서로를 향한 걱정이 충돌하면서,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긴장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특히 남편이 새로운 장비 구입까지 고민하면서 부부 사이의 의견 차이는 점점 선명해졌다. 늘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생기자, 일상의 균형도 함께 흔들렸다. 그러나 갈등은 서로의 삶을 지키려는 방식이 달라서 생긴 부딪힘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집은 여전히 꽃으로 가득한 채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시간은 조용히 흘러가고, 꽃대궐이라 불리는 이 공간 역시 다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시골 마을을 바꾼 부부의 이야기는 오는 6일부터 10일까지 오전 7시 50분 방송되는 KBS1 '인간극장-백 년 꽃대궐에 살아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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