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생명을 관찰하고,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며, 친구의 다른 감정 표현을 들었다. 게임판을 만들며 협력하고, 미술 재료를 사용해 자기 생각을 표현하며, 몸을 움직이며 놀이 규칙을 경험한다. ⓒ김영희
화창한 날, 나무 그늘 아래에서 놀이하던 아이들이 작은 애벌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선생님, 여기 애벌레가 있어요.”
“엄청 작다. 오늘 태어났나 봐.”
“그럼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자.”
아이들은 작은 애벌레를 둘러싸고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어른의 눈에는 그저 아이들이 벌레 한 마리를 보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이미 중요한 배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이들은 작은 생명을 발견했고, 태어남을 상상했고, 축하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애벌레 한 마리가 아이들의 호기심과 상상, 감정과 언어를 깨운 것이다.
교실로 돌아온 뒤에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아이들은 애벌레에게도 엄마가 있을지 궁금해했다.
“먹이를 구하러 갔을까?”
“우리 다음에 나가서 또 찾아보자.”
하며 애벌레 엄마를 걱정했다. 교사는 아이들의 생각을 따라가며 물었다.
“애벌레 엄마는 애벌레가 태어났을 때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
아이들은 “엄청 좋았을 것 같아요”, “기뻤을 것 같아요”,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럼 너희가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 엄마, 아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라는 질문에 아이들은 “기뻤을 것 같아요”, “울었을 것 같아요”, “우리 엄마가 나를 안고 감동했다고 했어요”라고 대답했다.
작은 애벌레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새 생명, 가족, 탄생, 기쁨과 감동으로 확장되었다. 이것이 유아의 놀이다. 유아의 놀이는 정해진 교재의 순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이들의 호기심이 길을 만들고, 아이들의 질문이 다음 배움을 연다.
이후 아이들은 자신에게는 어떤 감정이 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기쁨, 슬픔, 화남, 무서움, 긴장, 불안, 편안함. 아이들은 자신이 언제 그런 마음을 느끼는지 하나씩 꺼내 놓았다.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 때 기뻐요.”
“병원에 갈 때 무서워요.”
“엄마가 화낼 때 속상해요.”
“마음을 놓고 잘 때 편안해요.”
감정의 이름을 붙이고, 자기 경험을 말하고,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자기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함께 배워 갔다.
유아기의 배움은 빠를수록 좋은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는 발달의 순서와 속도가 있다. 충분히 보고, 듣고, 만지고, 움직이고, 상상하고, 관계 맺어야 할 시기가 있다. ⓒ김영희
교사는 아이들의 관심을 이어 받아 ‘감정 탐험 보드게임’을 제안했다. 아이들은 게임판을 직접 만들었다.
어떤 아이는 출발과 도착을 그렸고, 어떤 아이는 게임판에 넣고 싶은 감정을 골라 꾸몄다.
“게임판에 숫자도 있어야 해요.”
“미션이 있으면 재미있겠어요.”
라고 말하며 규칙도 스스로 생각했다. 그렇게 아이들의 감정 보드게임이 완성되었다.
게임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주사위를 던지고, 순서를 기다리고, 친구가 만든 규칙을 지키며 놀이한다. ‘안아주기’, ‘점프 세 번 하기’, ‘사탕 먹기’ 같은 미션을 수행하면서 불편한 감정을 풀어내는 방법도 자연스럽게 익힌다.
“‘화남’에 도착하면 사탕 먹기 해요. 사탕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은 놀이 안에서 감정을 표현하고 조절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가고 있었다.
놀이는 다시 ‘나만의 감정구급상자’ 만들기로 이어졌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그림책 『컬러몬스터 감정의 구급상자』를 들려주며 마음이 힘들 때 꺼내 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아이는 피카츄와 바다, 물고기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고, 어떤 아이는 엄마 사진, 하트, 꽃, 컴퓨터 게임, 숨바꼭질, 토끼와 초콜릿을 떠올렸다.
“나는 항상 별을 보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
“비눗방울 놀이하면서 터뜨리면 좋아요.”
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 애벌레 관찰에서 감정 돌보기까지, 아이들의 질문이 곧 배움이 되는 시간
이 장면은 유아가 놀이를 통해 얼마나 깊고 넓게 배우는지를 보여준다. 아이들은 생명을 관찰하고,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며, 친구의 다른 감정 표현을 들었다. 게임판을 만들며 협력하고, 미술 재료를 사용해 자기 생각을 표현하며, 몸을 움직이며 놀이 규칙을 경험한다. 교육과정 속 신체운동, 의사소통, 사회관계, 예술경험, 자연탐구의 내용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 속에서 통합적으로 이루어졌다.
2019 개정 누리과정이 ‘유아중심·놀이중심’을 핵심 방향으로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아교육은 아이에게 더 많은 지식을 더 빨리 가르치는 일이 아니다. 아이가 자신의 속도와 방식으로 세상과 만나고, 관계를 맺고, 몸과 마음을 움직이며 전인적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이다.
유아에게 놀이는 쉬는 시간이 아니라 배움의 시간이다. 놀이는 학습의 반대말이 아니라 유아에게 가장 자연스럽고 강력한 학습 방식이다.
◇ 눈에 보이는 ‘학습 결과'에 밀려난 놀이, 조기 사교육에 갇힌 아이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놀이보다 눈에 보이는 학습 결과를 더 쉽게 믿는다. 아이가 한글을 읽는지, 영어 단어를 몇 개 아는지, 숫자를 어디까지 셀 수 있는지는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놀이를 통해 길러지는 상상력, 자기조절력, 사회성, 협력, 문제해결력은 당장 점수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놀이의 가치는 과소평가되고, 조기학습의 성과는 과대평가된다.
부모들의 불안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놀기만 해도 괜찮을까?”
“다른 아이들은 벌써 영어학원에 다닌다는데 우리 아이만 늦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커진다. 그 불안 속에서 아이들의 시간은 학습지, 영어학원, 레벨테스트, 선행학습으로 채워진다. 4살 아이가 영어학원 레벨테스트를 보고, 만 5세가 되면 유치원과 어린이집 교실이 비어 가는 현실은 결코 자연스러운 교육 현상이 아니다.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놀이와 탐색의 시간이 조기 사교육에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 ‘빠른 선행학습'보다 중요한 것은 ‘제때' 자랄 수 있는 아동의 권리
유아기의 배움은 빠를수록 좋은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는 발달의 순서와 속도가 있다. 충분히 보고, 듣고, 만지고, 움직이고, 상상하고, 관계 맺어야 할 시기가 있다. 그 시기에 선행학습을 앞세우는 것은 아이의 성장을 앞당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경험을 빼앗는 일이 될 수 있다. 빨리 배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제때 자라는 것이다.
놀이를 단지 교육적 방법으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놀이는 아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제31조는 모든 아동이 휴식과 여가를 즐기고 놀이와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할 권리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놀이는 공부를 다 끝낸 뒤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다. 아이의 건강한 성장과 행복을 위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할 기본 권리이다.
◇ 얼마나 가르쳤는가에서 충분히 놀았는가로
이제 우리는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얼마나 많이 가르쳤는가”가 아니라 “아이가 충분히 놀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무엇을 빨리 배웠는가”가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 친구와 자연, 세상과 충분히 만났는가”를 살펴야 한다.
국가와 사회의 책임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유아에게 놀이가 배움의 방식이자 권리라면, 놀이를 개별 가정의 선택이나 기관의 교육철학에만 맡겨둘 수 없다. 모든 아이가 차별 없이 충분히 놀 수 있도록 시간, 공간, 환경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다.
먼저, 부모가 놀이를 신뢰할 수 있도록 사회적 메시지가 분명해야 한다. 국가는 유아 발달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놀이가 왜 중요한지 일관되게 알려야 한다. 부모가 불안 때문에 조기 사교육으로 밀려가지 않도록, 놀이중심 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사회 전체가 함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교사가 유아의 놀이를 깊이 관찰하고 적절히 지원할 수 있도록 전문성을 보장해야 한다. 놀이중심 교육은 아이들을 그냥 놀게 내버려 두는 교육이 아니다. 교사는 아이들의 흥미와 질문을 읽고, 놀이가 더 깊어질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하며, 필요한 순간에 언어와 자료와 관계를 지원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사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배울 수 있는 연수와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
셋째,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공간을 보장해야 한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에는 충분한 실내외 놀이공간이 확보되어야 하며, 안전하면서도 다양한 탐색과 도전이 가능한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지역에 따라 놀이환경의 격차가 생기지 않도록 공원, 숲, 놀이터, 지역사회시설 등 생활권 안의 놀이공간도 확충해야 한다. 단순히 사고를 예방하는 수준을 넘어, 아이들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탐색하며 도전할 수 있는 공간 기준이 필요하다.
넷째, 유치원과 어린이집, 가정, 지역사회가 함께 놀이를 지지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아이들의 놀이는 기관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집 앞 골목, 공원, 숲, 놀이터, 도서관, 마을 공간 전체가 아이들의 배움터가 될 수 있다. 아이들이 일상 속에서 충분히 놀 수 있는 사회는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를 함께 소중히 여기는 사회이다.
애벌레 한 마리를 위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은 생명을 느끼고, 감정을 표현하고, 친구의 마음을 들으며,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배웠다. 이것이 유아기의 배움이다. 어른이 미리 정해 놓은 정답을 빨리 외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만나고 관계를 맺으며 자기 안의 힘을 키워 가는 과정이다.
아이들의 시간은 어른들의 불안으로 채워져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놀 시간, 마음껏 탐색할 공간, 자신의 속도로 자랄 권리가 있다. 조기 사교육의 속도 경쟁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아이들의 현재이다. 아이들이 제때 자랄 수 있도록, 이제는 놀이의 시간을 돌려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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