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자경의 나비효과] 4755조 축포에 묻힌 한마디, 우리는 2019년을 잊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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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경의 나비효과] 4755조 축포에 묻힌 한마디, 우리는 2019년을 잊었는가

폴리뉴스 2026-06-30 08:53:17 신고

[편집자주] 박수가 가장 클 때, 가장 작은 목소리가 진실을 말한다. 전 방송사가 생중계한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는 4755조라는 숫자의 축제였으나, 그 합창의 한복판에서 한 소부장 기업인은 홀로 경고음을 냈다. "열기가 식었다"는 일곱 글자였다. 수백만 명이 같은 화면을 지켜봤지만, 정작 이 균열음을 받아 적은 곳은 드물었다. 정치의 무대에서 띄운 화려한 청사진이 산업의 가장 여린 살을 어떻게 비켜 가는지, 그 경로를 따라가 본다. 

지난 29일 청와대 영빈관.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하고 전 방송사가 생중계한 무대 위로 천문학적 숫자가 쏟아졌다. 삼성은 국내 2655조 원, SK는 2100조 원을 불렀고, 정부는 서남권에만 800조 원을 들여 메모리 팹 4기를 세우겠다고 공언했다. '회복을 넘어 대도약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무대는 온통 축포로 가득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를 주재하고 있다. 이날 보고회에서 박영수 솔브레인 대표는 소부장 국산화의 '열기가 식었다'고 경고했다. [사진=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를 주재하고 있다. 이날 보고회에서 박영수 솔브레인 대표는 소부장 국산화의 '열기가 식었다'고 경고했다. [사진=연합뉴스]

그 화려한 합창 속에서 박영수 솔브레인 대표는 홀로 다른 음을 냈다.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앞에서 활활 타올랐던 소재 · 부품 · 장비(소부장) 국산화의 열기가 "최근 그 열기가 다소 식는 느낌"이라는 경고였다. 이 짧은 한마디야말로 이번 보고회가 남긴 가장 묵직한 장면으로 꼽을 만하다.

1973년 중화학공업에 견준 사회학자, 그러나 2019년의 망각

이번 프로젝트의 무게를 가장 압축적으로 짚은 건 한 사회학자였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울산 디스토피아》 등을 저술하며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와 지방 산업도시의 명운을 천착해 온 양승훈 경남대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재명 정부의 산업정책은 규모 관점에서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 말고는 비교할 수 없게 됐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1973년, 2026년. 경부축을 빗겨난 유일한 작업인 건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호남과 비수도권을 산업 지도의 중심에 올린, 그 역사적 파격을 가리킨 진단이다.

우리 소부장 산업의 도약은 늘 정치가 당겼다. 2019년 아베 정권이 불화수소 · 포토레지스트에 빗장을 걸자, 그 외풍은 역설적으로 국산화의 불씨를 당겼다. 솔브레인이 불산계 고순도 식각액의 국산화로 주목받은 것도 그 무렵이다. 그러나 불꽃은 오래가지 못했다. 위기가 잦아들자 열기도 사그라들었고, 박 대표의 쓴소리는 정확히 그 망각을 겨눈다.

1973년에 견줄 역사적 승부수라는 평가가 무색해지지 않으려면, 규모의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치적 트리거가 산업의 도약을 부른 구도는 1973년에도, 2019년에도, 그리고 지금도 닮은꼴이다. 다른 것은 단 하나, 이번엔 그 불씨를 큰불로 키울 의지가 있느냐다.

다임리서치 '자율제조 두뇌',솔브레인 '소재 뿌리'가 가를 승부처

같은 무대에서 장영재 다임리서치 대표는 "껍데기만 바뀐 자동화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을 그었다. 축구장 수십 개 크기의 첨단 팹에서 수천 대의 로봇을 단 한 번의 충돌 없이 부리려면 "공장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뇌'가 필요하다"고 했다. 팹을 움직일 소프트웨어, 곧 '두뇌'의 국산화를 짚은 셈이다.

박영수 대표는 그 공장의 '뿌리'를 겨눴다. "아무리 좋은 도구가 있어도, 그걸 깎고 씻어낼 초정밀 소재가 없다면 1나노미터의 혁신도 일어날 수 없다"며, 소재 자립을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의 문제"로 격상시켰다. 두 사람이 한목소리로 가리킨 곳은 분명하다. 메가프로젝트의 승부는 팹을 짓는 대기업이 아니라, 그 안을 채울 두뇌와 뿌리를 누가 우리 손으로 쥐느냐에서 갈린다는 뜻이다.

종속의 본질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AI 모델이든 화학 소재든, 통제권이 우리 법의 테두리 바깥에 놓이는 순간 위험은 똑같이 자란다. 빌린 두뇌와 수입한 뿌리 위에 세운 첨단 산업은, 공급자가 가격을 올리거나 빗장을 거는 그 순간 고스란히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낙수' 끊기면 800조도 대기업 울타리 안 맴돌 뿐

박 대표가 말한 '톱니바퀴 상생 생태계'가 끝내 맞물리지 못하면 어떤 폭풍이 닥칠까. 800조짜리 팹은 외산 소재와 수입 소프트웨어로 채운 빈 껍데기에 그치고, 천문학적 투자는 지역과 중견 · 중소기업의 일감으로 번지지 못한 채 대기업 울타리 안에서만 맴돌게 된다. 그렇게 흘러가면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명분마저 공허해지고, 정권이 던진 회심의 승부수는 도리어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낙수는 저절로 흐르지 않는다. 박 대표가 반도체 전담 컨트롤타워를 통한 상시 지원을 호소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개별 기업 혼자만의 힘으로는 글로벌 거대 공룡과 싸워 이기기 어려운 탓이다. 대기업이 수요를 이끌고 중견 · 중소기업이 공급망을 받치고, 그 톱니바퀴가 끊김 없이 돌아갈 때, 비로소 800조의 청사진은 모래성을 면한다.

소부장 컨트롤타워, 초격차의 진짜 분수령

29일의 무대가 '얼마를 쓰겠다'는 약속의 자리였다면, 30일부터의 과제는 그 약속을 어떻게 식지 않게 지키느냐로 옮겨간다. 2019년, 위기가 부른 열기가 평온과 함께 사그라드는 광경을 우리는 이미 목격했다. 그 망각의 대가가 7년 뒤 같은 무대에서 같은 경고로 되돌아왔다.

초격차는 가장 큰 숫자를 부른 쪽이 아니라, 가장 오래 톱니바퀴를 돌린 쪽에 돌아간다. 첨단 소재와 자율제조 소프트웨어는 이제 산업의 부품을 넘어 국격이자 안보의 영역으로 올라섰다. 관건은 그 열기를 식지 않게 지켜낼 방법이다. 1973년에 견줄 역사적 승부수라는 평가가 헌사로 끝나지 않으려면, 전 국민이 지켜본 축제의 끝자락에서 한 소부장 기업인이 남긴 쓴소리부터 정부가 오래 기억해야 한다.

[폴리뉴스 조자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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