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석주원 기자 | 지난 25일(현지시간) 애플은 기습적으로 맥북과 아이패드 등 주요 제품의 가격을 100~300달러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국내 가격 기준으로 아이패드 프로는 40만원, 맥북 프로는 60~70만원 오르면서 적게는 18%에서 많게는 25%의 상승률을 보였다.
애플은 이번 가격 인상의 원인으로 메모리 반도체를 지목했다. 팀 쿡 애플 CEO는 17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현재의 반도체 원가 상승 압박을 ‘100년 만의 대홍수’에 비유했다. 그는 “40년 넘게 IT 공급망에 몸담았지만 특정 부품 가격이 이토록 단기간에 폭등하고 공급이 부족한 상황은 처음 본다”고 밝혔다.
▲ 애플 “메모리 가격 4배 상승” vs 마이크론 “자업자득”
애플 측은 인공지능(AI) 열풍으로 인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대형 빅테크 기업들이 AI 데이터센터용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고성능 저장장치를 싹쓸이하면서 일반 소비자 기기용 D램과 낸드(NAND) 플래시 가격이 수 분기 만에 약 4배 가까이 뛰었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원가 상승 압박을 자체적으로 흡수하며 가격을 동결해 왔으나 마진 압박이 한계에 도달해 소비자 가격 인상이 불가피했다는 게 애플의 입장이다.
그러나 애플이 가격 인상의 원인으로 메모리 반도체 가격의 급등을 지목하자 미국의 메모리 제조사 마이크론이 과거 애플의 행태를 폭로하며 정면 반박에 나섰다. 24일(현지시간) 마이크론 측은 애플의 이 같은 주장이 전형적인 ‘책임 전가’라고 직격했다.
수밋 사다나 마이크론 최고사업책임자(CBO)는 “과거 시장 침체기(2022~2023년) 당시 일부 대형 고객사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더 이상 깎을 수 없을 만큼’의 가격(Rock-bottom prices)을 강요했다”고 폭로했다.
당시 메모리 공급사들은 적자를 감수하며 물건을 넘겨야 했고 수익성이 극도로 악화된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 등 제조사들은 결국 2023년 설비 증설 및 미세공정 전환 투자를 대거 축소하거나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마이크론 측은 당시 해당 고객사에게 무리한 단가 압박이 향후 공급망 안정성에 결코 건설적이지 못하다고 경고했으나 무시당했다고 꼬집었다. 과거 애플이 제조사들의 체력을 깎아놓은 탓에 현재 AI 수요가 폭발했을 때 공급 물량을 충분히 받쳐주지 못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설명이다.
▲ 반도체 시장 역학 관계 대격변 예고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철저히 자사의 마진율을 사수하려는 기업 간의 이권 다툼이자 오랜 기간 누적된 공급망 내 ‘갑질’ 문제가 수면 위로 폭발한 결과라고 분석한다.
마이크론은 애플이 과거 5달러에 칩을 사 소비자에게 업그레이드 가격으로 99달러를 받았으며 7달러의 가격을 요구하는 마이크론을 비웃었다고 주장했다. 현재 마이크론은 애플에 메모리 가격으로 50달러를 청구하는데 애플은 제품 가격을 250달러 올렸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마이크론의 폭로가 이어지며 애플은 완제품 가격을 인상해 원가 부담을 소비자에게 고스란히 전가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다만 시장에서는 마이크론 역시 AI 호황을 틈타 막대한 폭리를 취하면서 애플을 탓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분쟁을 계기로 향후 글로벌 IT 및 반도체 업계의 역학 관계가 요동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우선 빅테크 기업들의 반도체 조달 전략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애플은 마이크론이나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미국의 제재 리스트에 올라 있는 중국의 제조사들로 대체 공급망을 다변화하려는 움직임을 가속화할 전망이다. 특정 제조사에 밀리지 않기 위해 공급처를 쪼개는 ‘멀티 벤더’ 전략이 강화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반면 메모리 제조사들 역시 하이엔드 칩 공급 부족 상황을 무기로 향후 대형 고객사들과 계약 시 일정 수준 이상의 가격 하한선을 보장받거나 장기 공급 계약(SCA) 조항을 묶어두는 등 협상 주도권을 가져오려는 시도를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독점적 구매력을 가진 애플과 기술적 우위를 점한 반도체 제조사 간의 금이 간 파트너십은 쉽게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라며 “공급망 다변화와 마진 방어를 위한 물밑 싸움이 치열해지면서 고래 싸움에 결국 소비자들의 완제품 구매 비용만 갈수록 늘어나는 구조가 고착화될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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