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주를 찾아서] 청명날 담그나, 청명날 마시나… 봄술의 두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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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주를 찾아서] 청명날 담그나, 청명날 마시나… 봄술의 두 시간

뉴스컬처 2026-06-26 17:55: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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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주 김영섭 명인. 사진=중원당 홈페이지
청명주 김영섭 명인. 사진=중원당 홈페이지

 

[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청명은 하늘빛이 맑아지고 어린잎이 겨울 기운을 밀어내는 절기다. 충주에서는 무르익은 술독의 봉인을 풀고 용수를 박아 청주를 떠냈다. 명칭도 음력 봄날의 변화에서 태어났다. 제조 시점은 하나로 정리하기 힘들다. '규곤요람'은 청명이나 곡우에 장류수를 길어 빚는다고 적었다. 김해김씨 문중은 절기보다 약 백일 앞서 밑술을 앉히고 절기 당일 개봉했다고 전한다. 앞선 문헌은 봄에 담그는 계절주를, 충주 전승은 겨울 동안 익혀 따뜻한 날 마시는 가양주를 가리킨다.

서로 다른 시간표는 오류보다 집집마다 달랐던 양조 관습을 보여준다. 꽃이 피는 속도와 샘물의 차가움, 항아리 표면의 온기를 살핀다. 다음 공정을 정했던 시대에는 자연 변화 자체가 발효 시계였다. 청명주라는 석 자 안에는 제조일과 음용일, 농경의 달력과 손끝 감각이 포개져 있다. 백일을 기다린 한 잔은 봄을 기념하는 술이면서 계절을 읽어낸 생활 기술이었다.

조선 중엽 '주방문'은 찹쌀가루와 물을 끓여 죽을 쑨 다음 누룩과 밀가루를 섞는다. 사흘가량 지나 고두밥을 보태는 법을 소개한다. '온주법'에는 구멍떡과 이화곡이 등장한다. '음식보'는 복숭아꽃이 필 때까지 기다렸다가 덧담금하라고 권한다. '임원십육지'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보리누룩, 소맥말, 조청에 불린 찹쌀, 후수법이 확인된다. 멥쌀 고두밥을 밑술에 쓰거나 발효제를 두 차례 넣는 주방문도 남았다. 죽, 범벅, 떡, 찐쌀은 하나의 정답을 뜻하지 않았다. 기온과 곡물 사정, 집안 입맛, 빚는 이의 숙련도에 따라 처방이 달라졌다. 도화가 피는 때를 기다리라는 문장은 달력보다 개화를 기준 삼은 옛사람의 감각을 드러낸다. 계절주란 특정 기념일에 붙인 이름보다 자연의 변화를 읽어 미생물 활동을 조절한 지혜에 가까웠다.

충주 금휴포 일대. 사진=중원당 홈페이지
충주 금휴포 일대. 사진=중원당 홈페이지

 

◇금탄의 물길, 과거길의 한 잔

남한강이 굽어 도는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는 뱃길과 과거길이 교차하던 마을이었다. 물산을 실은 배가 오갔다. 한양 시험장으로 향하던 선비도 이곳을 거쳤다. 귀한 손님에게 내던 집술은 이동로를 따라 명성을 넓혔다. 궁중 진상주와 사대부 접대주였다는 전승도 교통의 요충지라는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금탄 사람이 아니면 제대로 빚기 어렵다는 취지의 문구가 있다. 금탄은 중앙탑면 일대의 옛 지명으로 풀이된다. 일부 문헌에서 경북 김천을 산지로 소개한 까닭은 ‘쇠 금(金)’을 ‘김’으로 읽은 데서 생긴 혼동이라는 설명이다. 달래강, 창골 계류, 남한강 본류가 만나는 수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핵심 재료였다. 물맛이 달라지면 효모의 움직임과 산도의 방향도 변하므로 타지에서 동일한 풍미를 재현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생겼다.

예전에는 세 물줄기가 합쳐지는 수살매기 부근에서 물을 길었다고 한다. 조정지댐 건설 이후 침전 문제가 생기자 샘을 파서 수원을 바꿨다. 지역성은 옛 강물의 재현 여부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충주 기후, 문중 기억, 항아리를 다루는 습관, 누룩 상태를 읽는 기술이 겹겹이 쌓여 고유한 향미를 낳는다. 물의 교체에도 정체성이 사라지지 않은 까닭은 제조 환경 전체가 풍토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충주에서 마시면 문경새재에 가서야 취기가 풀린다”는 일화는 높은 도수를 과장한 우스갯소리보다 많은 사연을 갖고 있다. 과거를 보러 떠난 선비의 여정, 급제와 낙방의 감정, 길손을 대접하던 풍속이 짧은 문장 안에 담겼다. 실학자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평생 가장 좋아한 술이라 적고 제조법을 잊을까 염려해 글로 남겼다. 청명주는 지역 집술이면서 조선 지식인의 애호를 받은 명주였다.

청명주 관련 고서. 사진=중원당 홈페이지
청명주 관련 고서. 사진=중원당 홈페이지

 

◇찹쌀죽과 밀누룩, 백일의 안쪽

밑술의 몸체는 묽게 쑨 찹쌀죽이다. 통밀을 빻아 고운 가루를 추려 둥글게 뭉친 누룩이 당화와 알코올 생성을 이끈다. 사흘 남짓 지나 시루에서 찐 고두밥을 덧댄다. 죽은 전분 분해를 빠르게 돕는다. 단단한 쌀알은 서서히 풀리며 후반의 깊이를 보탠다. 찐쌀·누룩가루·밀가루·밑술을 대략 7대 1대 1대 1 비율로 쓰는 전승법은 물 사용을 억제해 농밀한 술덧을 얻는다. 주발효가 잦아들면 낮은 온도에서 후발효와 숙성이 계속된다. 옛 방식은 약 백일을 가리켜 중원당 약주는 거르지 않은 상태의 후숙까지 더해 반년가량 걸린다. 섭씨 15도 안팎의 환경에서는 효모 활동이 느리다. 거친 알코올 냄새가 가라앉고 배, 사과, 잘 익은 과육을 떠올리게 하는 향조가 차분히 쌓인다. 독 안에 용수를 박으면 탁한 지게미 사이로 투명한 술이 스며든다. 술덧 안에서 천천히 분리된 청주는 향과 점성을 비교적 온전하게 품는다.

맛의 중심에는 찹쌀의 감미와 산미가 있다. 멥쌀보다 단맛이 강한 곡물만 쓰면 무겁고 끈끈한 인상으로 기울 수 있다. 적은 물, 소량의 밀가루, 저온 숙성에서 생긴 새콤한 기운이 당도를 깎아 균형을 세운다. 혀끝에서는 둥근 달콤함이 퍼지고 곧 산뜻한 신맛이 윤곽을 정리한다. 질감은 농후하며 도수는 17도 안팎이지만 첫 모금은 예상보다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과실 향, 곡물의 고소함, 은근한 누룩 내음, 목구멍을 지나 남는 온기가 순서대로 감각을 채운다. 고급 화이트와인을 떠올리게 한다는 평가는 서양 주류와 닮았다는 뜻보다 당도와 산도의 조화를 설명하는 비유에 가깝다. ‘약주’라는 명칭도 약재 첨가 여부만으로는 뜻이 충분히 풀리지 않는다. 맑게 뜬 고급 청주를 높여 부르던 관습이 겹쳐 있다. 중원당 제품은 찹쌀·누룩·물 중심의 골격을 따른다. 복원 초기에는 인삼·갈근·더덕·탱자 등을 시험한 적도 있으나, 지금의 정체성은 곡물 발효와 저온 숙성에서 나온다.

윗술을 떠내면 약주가 되고, 술덧을 섞어 거르면 탁주가 된다. 중원당 탁주는 멥쌀 구멍떡을 밑술에 쓰고 찹쌀 고두밥을 덧댄다. 삶은 떡을 짓이겨 발효제와 섞는 공정은 손이 많이 가지만 부드러운 질감과 감칠맛을 살린다. 물 사용량도 약주보다 적어 단맛의 농도가 한층 짙어진다. 발효주를 토기 소주고리로 증류하면 청명소주가 태어난다. 한 항아리의 원리가 청주, 탁주, 증류주로 변주되며 한국 양조의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청명주 故(고) 김영기 옹. 사진=중원당 홈페이지
청명주 故(고) 김영기 옹. 사진=중원당 홈페이지

 

◇향전록을 살린 두 세대, 세계 식탁에 오른 봄술

김해김씨 집안의 민간 약방문 '향전록'에는 누룩 제조와 담금 순서가 남아 있었다. 권정순의 손은 박영아에게, 다시 김영기와 김영섭에게 전해졌다. 앞선 두 여성은 부엌의 노동과 구술로 비방을 지켰다. 세상에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 전승자의 손이 없었다면 문중의 봄술도 세대를 건너기 어려웠다. 약재 처방과 생활 지혜를 담은 책 속에 주법이 실렸다는 사실도 의미가 크다. 청명주는 상품이 되기 전 접객, 의례, 가사 운영을 감당한 생활 문화였다. 일제강점기 주세 제도는 집집마다 담그던 관습을 끊었고, 해방 후 쌀 사용 제한도 쇠퇴를 재촉했다. 故(고) 김영기 옹은 집안 책자를 꺼내 복원에 매달렸다. 1990년대 초 충북 무형유산 제2호로 지정됐으나 원료 비율만 따라간다고 옛맛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주방문에는 온도, 습도, 효모 상태, 용기 관리가 세세하게 남지 않았다. 누룩 품질이 일정하지 않아 실패가 거듭됐고 약재와 개량 발효제를 시험한 시기도 있었다.

아들 김영섭 명인은 식품공학을 공부하고 여러 연구기관과 술도가에서 기술을 익혔다. 오랜 실험 끝에 2016년 무렵 '향전록'의 배합을 안정적으로 재현했다. 선친이 끊긴 제조를 되살렸다면 후대 보유자는 매번 일정한 품질을 낼 수 있는 생산 체계를 세웠다. 복원은 옛 문장을 베끼는 작업보다 빠진 조건을 경험과 과학으로 채우는 노동에 가까웠다. 상품화의 길은 1994년 약주 제조면허와 출시에서 출발했다. 2007년 김영섭 명인이 충북 무형유산 보유자로 지정됐고, 2013년 전수교육관이 세워졌다. 2015년 찾아가는 양조장 선정과 2017년 탁주 면허 취득은 체험과 제품군 확대를 이끌었다. 2018년 대한민국 주류대상 약주 부문 수상, 우리술 품평회 탁주 최우수상은 품질에 대한 외부 평가를 얻은 계기였다.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주류대상 수상이 계속됐고, 2021년 청와대 추석 선물로 2만2000병이 납품됐다.

해외 시장은 2022년 중국과 싱가포르 수출에서 본격화됐다. 신세계백화점과 대형 유통망 입점, 서울 지사 설립도 그 무렵 진행됐다. 2023년 한·태평양도서국 정상회의 공식 만찬주 채택은 가문의 접대주가 외교 식탁에 오른 순간이었다. 2024년 제조법 특허 출원과 청명소주 출시는 전승 기술을 새 제품으로 확장한 시도였다. 지난해는 청명40 술품질인증과 대한민국식품명인 제101호 지정됐다. 무형유산이 공동체의 전승 가치와 제조 기예를 보호하는 제도라면 식품명인은 특정 기능자의 숙련과 산업적 지속성을 인정하는 장치다. 두 제도는 오래된 주법과 지금의 생산 능력을 각각 비춘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시즌3’ 최후의 만찬 식탁에 오른 검은 도자기 병도 충주의 봄술이었다. 조선 과거길의 접대주가 세계 시청자 앞에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사진=중원당 홈페이지
청명주. 사진=중원당 홈페이지

 

농경사회에서 청명은 물과 바람, 씨앗의 변화를 살피는 날이었다. 요즘 소비자에게는 백일의 기다림, 저온 숙성, 지역 수질, 문중의 기억이라는 언어로 다가간다. 달콤함 끝에서 산미가 길을 내고, 높은 도수 속에서 부드러운 과실 향이 번진다. 청명주는 봄을 날짜보다 맛으로 기억했던 한국인의 오래된 감각을 한 잔에 건넨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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