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컴퓨터 개발이 암호화폐 종말로 이어질 거라는 우려는 과장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양자컴퓨터가 장기적으로 기존 암호체계에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에는 공감하면서도 이에 대응하기 위한 양자내성암호(PQC) 기술 역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만큼 '비트코인 종말론'으로 연결하는 것은 성급한 해석이라고 진단했다.
지난 22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양자기술 혁신과 첨단 암호공격 대응을 위한 행정명령 2건에 서명했다. 행정명령의 핵심은 양자컴퓨터 개발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는 동시에 미래 보안 위협에 대비한 양자내성암호(PQC) 체계를 조기에 구축하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2028년까지 과학 연구용 고성능 양자컴퓨터 개발을 추진하고 연방정부 차원의 차세대 암호체계 전환도 앞당길 계획이다.
이와 함께 연방정부 시스템의 양자내성암호(PQC) 전환 시점도 기존 2035년에서 2031년으로 4년 앞당겨졌다. PQC는 양자컴퓨터의 공격에도 안전성을 유지하도록 설계된 차세대 암호체계로 미래 양자컴퓨터 시대에 기존 암호기술을 대체할 핵심 보안 기술로 꼽힌다. 미국이 양자컴퓨터라는 강력한 공격 수단을 개발하는 동시에 이에 대응할 보안체계 구축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는 의미다.
양자컴퓨터가 가상자산 시장에 미칠 영향을 놓고 전문가들의 분석에는 일부분 차이가 있었지만 PQC 기술 개발과 도입 속도가 향후 비트코인 생태계의 안정성을 좌우할 핵심 변수라는 점에는 모두 의견을 같이했다. 최병호 고려대 휴먼 인스파이어드 AI연구원 연구교수는 "양자컴퓨터가 기존 암호체계를 무력화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를 방어할 수 있는 보안기술도 함께 발전할 것이다"며 "다만 아직은 공격 기술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해 이를 완벽하게 방어할 기술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상황이다"고 말했다.
이어 "가상자산 투자자 입장에서는 양자컴퓨터 발전 소식이 악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면서도 "양자컴퓨터는 기존 암호체계를 위협할 수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보안체계 구축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결국 위협과 기회가 공존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만큼 비트코인 종말론은 아직 시기상조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김형중 국민대 암호화폐연구센터 센터장은 양자컴퓨터의 발전이 곧 비트코인의 존립 위기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김 센터장은 "양자컴퓨터가 등장한다고 해서 비트코인이 곧바로 사라지거나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며 "비트코인 역시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시스템이다"고 강조했다. 이어 "양자컴퓨터가 기존 암호체계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 수준까지 발전하더라도 비트코인 네트워크는 양자내성암호(PQC)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며 "기술이 발전하면 이를 방어하기 위한 보안기술도 함께 발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양자컴퓨터 때문에 비트코인이 무너진다고 주장한다면 같은 논리로 현재의 은행 시스템이나 인터넷 금융망 역시 위험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며 "실제로 금융권도 양자내성암호 도입을 준비하고 있는 만큼 비트코인만 특별히 취약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국내 정보보호 분야 석학으로 꼽히는 염흥열 한국디지털인증협회 회장은 양자컴퓨터가 가상자산 시장에 미칠 위험성을 보다 높게 평가했다. 다만 PQC 기술 개발로 비트코인 보안 기술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데는 의견을 함께했다. 염 회장은 "양자컴퓨터가 본격적으로 상용화될 경우 비트코인의 가치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며 "현재 비트코인은 디지털 서명과 해시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보안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충분한 성능의 양자컴퓨터가 등장하면 이러한 암호체계의 안전성이 약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비트코인 블록체인이 거래 검증과 네트워크 운영 과정에서 해시 함수와 합의 알고리즘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만큼, 양자컴퓨터 기술이 발전할 경우 현재의 보안 전제가 흔들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당장 비트코인이 무너진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글로벌 시장 참여자들이 보안 리스크를 인식하게 되면 자산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며 "결국 PQC 체계로의 전환 속도가 비트코인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양자컴퓨터 개발에 속도를 내는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비트코인을 보유한 국가 중 하나인 미국이 양자컴퓨터 개발 경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것은 단순히 기술 패권 확보뿐 아니라 미래 보안 리스크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며 "현재 국제 정세는 사이버 공간을 둘러싼 디지털 전쟁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주요 해커 조직 상당수가 러시아 등 특정 국가를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양자컴퓨터 기술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려는 것은 공격보다 방어 차원의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황 교수는 "양자컴퓨터 시대에는 국가 기밀은 물론 금융시스템과 가상자산 보안체계까지 새로운 위협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이 관련 기술 개발을 서두르는 것도 이 같은 위험에 대비해 핵심 정보자산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으로 볼 수 있다"며 "결국 미국에서도 양자내성암호(PQC) 체계를 얼마나 빠르게 구축하느냐에 사활을 걸 것이다"고 전망했다.
한편, 양자컴퓨터에 대한 우려가 확산하면서 가상자산 시장은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다. 26일 국내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에 따르면 비트코인은 이날 오전 장중 한때 8900만원까지 하락하며 9000만원선이 붕괴됐다. 지난해 10월 장중 1억7986만원을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면 약 8개월 만에 50% 이상 떨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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