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혜의 런던 미술 노트] 자연과 조각이 함께 호흡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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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혜의 런던 미술 노트] 자연과 조각이 함께 호흡하는 시간

문화매거진 2026-06-26 12:52:52 신고

[문화매거진(영국)=박은혜 작가] 런던 남서부의 큐가든(Kew Gardens)은 세계 최대 규모의 살아 있는 식물 컬렉션을 보유한 왕립식물원으로, 다양한 식물종과 역사적 정원 경관으로 유명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단순한 공원을 넘어, 18세기 왕실 정원에서 출발해 식물의 수집과 분류, 보존과 연구의 중심지로 발전해 온 살아 있는 자연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유네스코는 큐가든을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정원 예술의 변화를 보여주는 역사적 풍경 정원으로 설명한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오래된 수목, 고요한 호수, 다양한 스타일의 유리 온실, 파고다 같은 건축물이 이어지는 풍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야외 박물관처럼 느껴진다.

이 아름다운 정원 곳곳에 현재 영국을 대표하는 조각가 헨리 무어(Henry Moore, 1898-1986)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빛과 식물, 건축물 사이를 걸으며 조각을 하나씩 발견하는 경험은 예상보다 훨씬 강렬하다. 자연에서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큐가든은 식물원이자 미술관이 되고, 산책은 곧 전시 관람이 된다.

▲ 큐가든 내 헨리 무어 작품 / 사진: 박은혜 제공
▲ 큐가든 내 헨리 무어 작품 / 사진: 박은혜 제공


헨리 무어는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조각가다. 특히 공원, 광장, 미술관 야외에 놓이는 대형 브론즈 조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사실적인 인체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사람의 몸을 돌과 뼈, 산과 동굴 같은 자연의 형태로 추상화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무어의 대표적인 주제는 ‘누워 있는 인물(Reclining Figure)’, ‘어머니와 아이(Mother and Child)’, 그리고 ‘안과 밖의 형태(Internal and External Forms)’다. 그의 조각을 보면 몸통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거나 덩어리와 빈 공간이 함께 작품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이 ‘비어 있음’은 헨리 무어 조각의 핵심적인 매력 중 하나다. 비어 있는 공간은 결핍이 아닌, 바람과 빛, 풍경이 드나드는 통로가 된다.

▲ 헨리 무어 작품 / 사진: 박은혜 제공
▲ 헨리 무어 작품 / 사진: 박은혜 제공


큐가든에서 만나는 헨리 무어의 작품은 바로 이 지점에서 더욱 빛난다. 조각의 구멍 사이로 나무와 하늘, 잔디와 건축물이 보이고, 묵직한 브론즈와 부드러운 자연 풍경이 서로를 비춘다. 작품은 정원 위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풍경 속으로 스며든다.

헨리 무어는 조각이 실내 받침대 위에 고정된 오브제로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작가였다. 그는 조각이 풍경, 빛, 계절, 나무와 함께 호흡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번 큐가든 전시 역시 이러한 그의 예술관을 잘 보여준다. 정원 곳곳에는 30점의 대형 조각이 배치되어 있고, 실내 공간에서는 드로잉과 모형, 소형 작품도 함께 소개된다.

▲ Grey Tube Shelter, 1940. © Henry Moore. Photo: Tate
▲ Grey Tube Shelter, 1940. © Henry Moore. Photo: Tate


▲ Tube Shelter Perspective, 1941. © Henry Moore. Photo: Tate
▲ Tube Shelter Perspective, 1941. © Henry Moore. Photo: Tate


무어는 조각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작업에서 드로잉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 지하철역에 피신한 사람들을 그린 ‘Shelter Drawings’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어둠 속에 웅크린 사람들의 몸, 서로 포개진 형태, 보호받는 듯한 덩어리감은 이후 그의 인체 조각과도 깊이 연결된다.

한마디로 헨리 무어는 인체를 자연 풍경처럼 만들고, 조각이 공간과 대화하도록 만든 작가다. 그의 작품은 사람의 몸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산과 바위, 동굴과 나무, 빛과 그림자를 떠올리게 한다.

이번 전시는 무어가 약 70년에 걸쳐 이어온 작업 세계를 한눈에 보여준다. 작품 하나하나는 분명 거대하지만, 광활한 큐가든 안에서는 오히려 적절한 크기로 느껴진다. 넓은 잔디와 오래된 나무들 사이에서 브론즈 조각은 압도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

▲ 헨리 무어 작품 / 사진: 박은혜 제공
▲ 헨리 무어 작품 / 사진: 박은혜 제공


브론즈의 깊은 색감은 나무의 갈색 기둥과 조화를 이루고, 단단하고 정돈된 조각의 형태는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와 대비를 이룬다. 그 대비 덕분에 작품의 묵직함은 더욱 선명해지고, 조각이 가진 힘과 아름다움은 한층 깊게 다가온다.

싱그러운 계절의 큐가든에서 헨리 무어를 만나는 일은 단순한 전시 관람을 넘어선다. 그것은 자연 속을 걷고, 빛의 방향을 따라가고, 문득 눈앞에 나타난 조각 앞에서 멈추고 사색하는 경험이다. 여름의 정원과 유난히 잘 어울리는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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