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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상상력

노블레스 2026-06-26 10:00:00 신고

로커스상은 SF·판타지 장르의 현재를 가장 민감하게 포착해온 주요 문학상으로, 동시대 장르 문학의 흐름과 독자의 지지를 함께 보여주는 지표와도 같다. 특히 올해 처음 신설된 번역 소설 부문에서 최종 후보 열 편 중 한국 작품 네 편이 이름을 올린 것은 주목할 만한 성취다. 정보라의 <붉은 칼>과 <한밤의 시간표>, 천선란의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절판된 김성일의 <메르시아의 별>까지. 이 중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세 작품을 중심으로 세계 독자에게 가닿은 한국 SF의 저력을 짚어본다.
<천 개의 파랑>으로 한국 SF의 감정적 지평을 넓힌 천선란 작가는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에서 뱀파이어라는 오래된 상징을 고립과 돌봄, 구원의 문제로 새롭게 불러낸다. 인천 구시가지의 재활 병원에서 일어난 의문의 죽음, 이를 파헤치는 형사 ‘수연’, 뱀파이어 헌터 ‘완다’, 벼랑 끝에 선 간호사 ‘난주’의 이야기가 어둡고도 매혹적인 결로 교차한다. 이 작품에서 뱀파이어는 공포의 대상이기보다 삶의 의미를 잃은 이들 앞에 나타난 낯선 가능성에 가깝다. 외면당한 존재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붙드는 순간, 장르적 긴장감은 저주와 구원 사이에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부커상, 전미도서상, 필립 K. 딕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한국 장르 문학의 이름을 세계 무대에 각인시킨 정보라 작가. 그는 이번 로커스상 번역 소설 부문에 두 작품을 올렸는데, 그중 <붉은 칼>은 1600년대 ‘나선정벌’을 모티브로 식민지 포로 여성 전사들의 여정을 외계 전쟁기로 옮긴 SF 판타지다. 흰 먼지로 뒤덮인 황무지 행성, 낯선 종족과의 전투,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이들의 마음이 속도감 있게 펼쳐진다. 먼 미래의 우주 전쟁을 그리지만, 그 안에는 오늘의 폭력과 자유를 향한 감각이 날카롭고도 묵직하게 스며 있다.
정보라의 또 다른 후보작 <한밤의 시간표>는 정체불명의 물건을 보관하는 수상한 연구소를 배경으로, 야간 근무자들과 그곳에 놓인 물건에 얽힌 일곱 편의 기이한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저주와 복수, 귀신과 비존재의 세계를 다루면서도 작품은 단순한 공포에 머물지 않는다. 낮의 질서 바깥에 놓인 존재를 향해 온기 어린 시선을 건네며, 이성과 합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세계의 틈을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진짜 귀신 얘기”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정보라 특유의 서늘한 상상력과 다정한 응시가 만나는 또 하나의 낯선 밤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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