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걸', 김치찌개가 삭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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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걸', 김치찌개가 삭았습니다

엘르 2026-06-24 06:00:00 신고

*** 영화 〈슈퍼걸〉의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견고하게 확립된 '스타일'은 가끔 한순간에 '자기복제'로 변질되곤 합니다. 김치찌개 급의 '클래식'을 만들지 않는 한 말이죠. 아무리 김치찌개라도 삼시 세끼 매일 먹기란 쉽지 않습니다. 참치도 넣어 보고, 고기도 넣어 보면서 더 오래 즐길 수 있는 맛을 찾아내는 게 보통입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클래식이 완성됐다 한들 그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의 변주가 필수적으로 동반돼야 합니다. 그런데 제임스 건의 DC 유니버스에는 변주의 의지가 안 보여요. 지난해 리부트된 〈슈퍼맨〉에 이어 〈슈퍼걸〉까지 낡고 유사한 패턴을 답습하는 모양새입니다. 잠시 각본과 감독을 다른 이들에게 맡겼다고 벗겨질 오명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영화 〈슈퍼걸〉

영화 〈슈퍼걸〉


〈슈퍼걸〉은 〈슈퍼맨〉에 처음 등장했던 여성 크립톤인 카라(밀리 앨콕)의 솔로 무비입니다. 1984년 이후 무려 42년 만에 나온 슈퍼걸 영화죠. 칼-엘, 클라크(데이비드 코런스웻)의 사촌인 카라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반려견 크립토와 함께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방랑자입니다. 노란 태양 아래서만 초월적 능력이 발현되는 그는 일부러 노란 태양이 없는 곳을 골라 다닙니다. 거기서는 술을 마시면 마시는 대로 취하고, 누군가와 싸우면 고통도 느껴지고 피도 나요. 그러니까 일종의 자해 같은 겁니다. 카라는 고향을 쫓겨나듯 떠나며 얻은 트라우마를 치유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스스로를 학대합니다.


그러던 중 카라는 악명 높은 도적단의 우두머리, 노란 언덕의 크렘(마티아스 스후나르츠)에게 가족을 몰살당한 루시(이브 리들리)를 만나게 됩니다. 열세 살 소녀 루시는 자기 대신 복수를 해 줄 사람을 구하고 있었는데요. 처음에는 엮이려 하지 않던 카라였지만, 크립토가 크렘의 독화살에 맞아 단 사흘 밖에 살 수 없는 처지에 놓이자 루시와 손을 잡습니다. 공공의 적이 생긴 거예요. 우주선까지 뺏긴 카라는 버스를 타고 다니며 크렘의 행방을 쫓습니다. 이후로는 그가 크렘을 찾을 때마다 모종의 방해로 잡히고, 탈출하면 어떤 원인으로 힘을 잃었다가 중요한 순간에 회복하는 식의 진행이 반복됩니다.


영화 〈슈퍼걸〉

영화 〈슈퍼걸〉


영화는 전체적으로 캐릭터 구축보다 상황 설정에 집중한 듯합니다. 우선 장면을 짜 놓고 캐릭터를 욱여넣다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 대목이 눈에 띕니다. 특히 각 캐릭터의 능력치가 왔다갔다 해요. 노란 태양 아래선 술도 취하지 않는 슈퍼걸이거늘 환경이 주어져도 도적단 두목 하나를 때려 눕히지 못합니다. 자꾸 놓쳐야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이죠. 크립토가 사흘 밖에 못 산다는데 해독제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아 보입니다. 노란 태양이 없는 태양계에서도 어느 순간엔 피지컬로만 악당들을 물리칩니다. 그러다가도 힘을 아예 못 쓴 채로 당할 때도 있고요. 카라가 진짜 끝의 끝까지 찾아온 위기에 직면할 때 맥락도 없이 등장하는 노란 태양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영화 〈슈퍼걸〉

영화 〈슈퍼걸〉


얌전히 있다가 꼭 나서면 안될 상황에 나서는 루시는 청소년 캐릭터라 차치하더라도, 크렘이 극 중 최강의 빌런이라기엔 너무 약하고 볼품 없습니다. 액션 한 번 시원하게 하는 장면 없이 비열하고 잔인한 성격만 보여줘요. 이를테면 카라와 자기 부하들이 한참 싸우는 와중에 한가하게 루시를 잡겠다고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대목에서 최종 빌런의 카리스마보다는 시정잡배의 한심함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잡아야만 하는 동기도 없었는데 말이죠. 많은 DC 팬들의 기대를 모았던 로보(제이슨 모모아)는 어떻게 활용된 캐릭터인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비주얼은 요란한데 필요한 땐 없고 필요하지 않을 때 나타납니다. 분명 카라와 루시에게 조력하는 부분은 있지만 왠지 끝까지 도와주진 않아요.


영화 〈슈퍼걸〉

영화 〈슈퍼걸〉


〈슈퍼걸〉의 핵심적 문제는 여성관입니다. 〈슈퍼맨〉에서 거의 모든 여성 캐릭터들을 백치로 그린 것에서 더 나아가요. 크렘이 루시를 잡으려는 이유가 매우 불순합니다. 처음엔 유명한 무기 장인인 루시 아버지의 칼을 노리는가 했더니, 도적단의 대를 이을 여자 중 하나로 루시를 보고 있는 거였어요. 거기다 도적단이 납치한 여자들에게 흰 옷을 입혀 가두고 '신부'라고 부르는 부분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패러디인가 싶을 정도의 기시감이 느껴집니다. 다만 21세기 스페이스 판타지에 빌런의 악행 묘사를 위해 씨받이 설정을 내세우는 것에 탄식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수만 광년 떨어진 행성을 오가는 대중교통까지 있는 마당에 번식 쯤은 알아서 해도 좋지 않았을까요.


제임스 건이 DC 유니버스의 수장이 되고 처음 나온 〈슈퍼맨〉까지는 그의 '스타일'을 반영한 작품이라고 선해할 수 있었습니다. 다소 음울하고 무거웠던 DC 영화의 분위기를 반전시킨 공도 있었고요. 하지만 〈슈퍼걸〉에서도 되풀이되는 '스타일'은 '자기복제'로 전락합니다. 이제 아비규환 전투 장면에 슬로우를 걸고 그 위에 감성 명곡을 까는 연출은 지루합니다. 2010년대 한국 영화의 "선수 입장" 만큼 피로감이 느껴져요. 제임스 건이 감독에 각본까지 직접 맡는다는 '슈퍼맨' 시리즈의 후속작, 〈맨 오브 투모로우〉가 불안해지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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