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개정 노동조합법, 이른바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실제 본교섭 절차에 들어간 원청은 10개소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교섭창구 단일화 등 법정 절차가 진행 중인 만큼 원·하청 교섭이 안정적으로 안착하고 있다고 평가했지만 노동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실질 교섭 진입이 지나치게 더디다는 지적이 나온다.
23일 고용노동부(이하 노동부)에 따르면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약 100일이 지난 6월 19일 기준, 원청 사업장 439개소를 대상으로 1161개 하청노동조합 조합원 16만4000명이 교섭을 요구했다. 1개 원청 사업장당 교섭 요구는 평균 2.6건으로 집계됐다. 교섭 요구는 시행 첫 달인 3월 원청 363개소에 집중된 뒤 4월 42개소, 5월 23개소가 추가되는 데 그쳤다.
노동부는 법 시행 초기 사용자성 판단 사례가 충분하지 않은 만큼, 사용자들이 노동위원회 판단 절차를 통해 교섭 의무 여부를 확인한 뒤 교섭을 진행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일각에서 제기한 ‘교섭 쓰나미’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교섭 요구가 제기된 439개소 원청 사업장 가운데 42개소만이 노동위원회 판단을 거치지 않고 자율적으로 교섭 요구 사실을 공고하며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에 착수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인천의료원이 거론된다. 인천의료원은 원청 노조의 중재로 지방노동위원회의 사용자성 판단 절차 없이 하청노조의 교섭 요구를 수용했으며 현재 하청노조와 3차 교섭까지 진행한 상태다.
교섭 요구 이후 사용자성 등에 관한 노동위원회 절차가 진행된 원청은 141개소였다. 이 가운데 노동위원회에서 사용자성을 인정받은 원청은 103개소로 나타났다. 사용자성이 인정된 원청 중 결정서가 송달되지 않은 32개소를 제외한 71개소 가운데 54개소는 노동위원회 판단에 따라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를 밟고 있다.
그러나 교섭창구 단일화를 마치고 교섭 의제와 일정 등을 실무협의하고 있는 원청은 51개소에 그쳤다. 상견례 등 본교섭 절차에 들어간 원청은 10개소에 불과했다.
노동부는 이를 교섭 지연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노동부는 “창구 단일화 절차를 진행 중인 나머지 기업도 교섭 요구 노동조합 확정 공고를 진행 중이거나 교섭대표 노동조합 결정 절차를 거치고 있어 조만간 교섭에 착수할 것”이라며 “교섭창구 단일화는 기존 원청의 복수노조 사업장에서도 적용되는 제도로 교섭 요구 사실 공고와 교섭대표노조 결정 절차 등에 일정 기간이 소요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노동계에서는 원·하청 교섭이 제도 시행 취지에 비해 지나치게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교섭을 요구한 노동조합의 상급단체별 비중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 47%, 한국노동조합총연맹 43.6%, 미가맹 9.4% 순이었다.
민주노총은 전날 성명문을 통해 “원청 단위 초기업교섭에 창구단일화 절차를 적용하면서 교섭 절차가 복잡해졌고 교섭단위 분리 제도 역시 노동위원회의 보수적 판단으로 현장 갈등을 키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시행 100일 상황을 안정적으로 평가하기에는 이르다고 봤다. 실제 현장은 원청의 법적 판단 대기와 하청노조의 행동 준비가 맞물린 ‘폭풍 전야’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고려대 로스쿨 박지순 교수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현재 교섭 진행은 굉장히 지연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원청 입장에서는 고용주도 아닌데 왜 교섭 당사자가 돼야 하는지, 교섭에 응하면 어떤 파급 효과가 생길지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박 교수는 “자발적으로 교섭에 응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구심이 많을 수밖에 없고, 재심이나 행정소송을 통해 법적 판단을 기다리는 대기 상태로 봐야 한다”고 진단했다.
이어 “지금까지 조용하다고 해서 평화적이거나 안정적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안이한 판단”이라며 “중앙노동위원회 재심 판정이 나오면 하청노조는 더 이상 법원 확정판결까지 3~5년을 기다리기 어렵다. 교섭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부당노동행위 구제 신청이나 파업 등 실력 행사로 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공공부문에 대한 지적도 이어졌다. 개정 노조법 시행 이후 지방자치단체와 중앙정부 산하 공공부문에서도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 교섭을 요구하고 있지만, 정작 정부와 공공기관이 사용자성을 부인하며 교섭에 응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다.
1357중소기업통합콜센터 상담사들이 가입한 노동조합이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노조에 따르면 충남지방노동위원회는 지난 18일 1357중소기업통합콜센터 교섭단위 분리 심문회의에서 중소벤처기업부가 상담사들의 노동조건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중소벤처기업부는 노조 측과 교섭 절차를 진행하지 않고, 국내 대형 로펌인 법무법인 율촌을 선임해 교섭 요구에 대응하고 있다. 노조는 “노조법 2·3조의 취지는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사용자가 노동자와 책임 있게 교섭하도록 하자는 것임에도 정작 중앙부처가 이 취지에 역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공공부문 원청 교섭이 지지부진한 데 대해 노동계 안팎에서는 정부의 책임 있는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동부가 개정 노조법 시행 100일을 맞아 원하청 교섭이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평가했지만 현장에서는 원청이 사용자성을 부인하며 교섭에 응하지 않는 사례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오민규 연구실장 역시 정부와 공공부문의 태도를 문제로 짚었다. 오 연구실장은 “정부는 개정법이 안착될 것이라고 하면서 모범 사용자로서 먼저 교섭에 나서겠다고 강조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하지 않고 있다”며 “공공부문에서 먼저 노동안전 문제라도 의미 있는 합의를 끌어냈다면 현장에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라는 신호를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힌트를 전혀 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법의 실효성은 당장 체감되지 않더라도 현장에 작동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며 “현재로서는 정부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원·하청 교섭이 제도 취지에 맞게 안착하려면 정부와 사용자 측의 책임 있는 대응과 함께 노동계 내부의 현장 준비도 촘촘해져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익명을 요청한 한 노동계 관계자는 “노조법 개정 과정에서 쌓인 기대가 실제 교섭 성과로 이어지려면 각 사업장 상황에 맞는 요구를 더 구체화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며 “공동 요구안을 제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조합원 토론을 통해 현장에서 가장 절실한 의제를 좁혀가는 작업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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