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기구·NGO "미국 등 지원 축소에 보건소 도미노 폐쇄…수백만 위태"
식량·물류 대란 등 복합 위기…정부, 에볼라 긴급 인도적 지원도 검토
(서울=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당장 내일부터 보건소 문을 닫아야 합니다. 원조가 끊기면 오늘 밤 열이 나는 아동을 진단할 수도, 굶주린 영아에게 치료식을 먹일 수도 없습니다."
아프리카 보건의료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활동가들이 마주한 현실은 이처럼 참혹하다. 주요 선진 공여국들의 원조 삭감 여파가 수백 개의 지역 거점 보건 시설 폐쇄 등으로 이어지면서 수백만 명이 사지에 내몰렸다는 우려가 나온다.
외부 지원에 의존해 온 취약한 보건 생태계가 멈춰선 데 이어 백신 없는 신종 에볼라 바이러스 창궐, 중동 사태에 따른 물류 대란 등이 동시에 아프리카를 덮쳤다. 국제구호기구와 비정부기구(NGO)는 최후의 생명줄이 통째로 끊어질 거라고 호소한다.
◇ 보건소 문 닫고 치료식 중단…원조 삭감이 부른 비극
21일 현장에서 활동하는 국제기구 등에 따르면 원조 삭감의 여파는 글로벌 사우스(주로 남반구에 위치한 신흥국과 개발도상국) 지역사회 보건의 핵심 축인 기초 의료시설의 연쇄 폐쇄와 필수 의료 프로그램의 중단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2025년 미국의 원조 축소로 6천200건의 미국 국제개발처(USAID) 보조금 가운데 5천800건(93.5%)이 종료됐다고 전했다. 콩고민주공화국(DR콩고)에서만 20만여명의 주민에게 기초 의료를 제공하던 보건소 92곳이 폐쇄 위기에 몰렸다.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주요 공여국들의 인도주의 프로그램 축소로 소말리아에서는 영양 서비스 시설 125곳 등 기초 보건 시설 400여곳이 문을 닫았다. 유니세프는 올해 동·남부 아프리카에서 '중증 급성 영양실조(SAM)'로 고통받는 5세 미만 아동이 4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전통적으로 미국 재원에 기반한 유엔 파트너 기관들과 협력해 온 월드비전의 타격도 만만치 않다. 다자기구의 예산이 동결되면서 월드비전이 전 세계에서 진행하던 31건의 핵심 보건 사업이 영향을 받았고, 21건은 공식적인 사업 중단 통보를 받았다.
2025년 12월 기준 앙골라와 DR콩고 등에서 집행되지 못한 사업비는 8천600만달러(약 1천319억원)로, 전체 사업비(1억5천200만달러)의 57%에 달한다. 이에 따라 취약계층 83만9천명이 의료 공백의 직격탄을 맞았다.
국경없는의사회(MSF)는 미국 정부 자금을 받지 않지만, USAID 철수로 인한 공동체의 어려움은 체감하고 있다. 소말리아 바이도아 지역 병원에서는 치료용 분유 공급 중단 등으로 지난해 상반기 중증 영양실조 아동 사망률이 전년 대비 44% 급증했다.
굿네이버스는 카메룬 등에서 재정 기반이 약화해 보건 요원들이 현장을 찾아가는 '아웃리치' 활동이 전면 축소됐다고 소개했다. 그 여파로 카메룬 현지 보건소의 환자 진료 규모는 전년 대비 35% 감소했다.
◇ 백신 없는 에볼라 공포…'기아'와 '불신'이 무너뜨린 방역망
기초 보건망이 허물어진 자리에 백신과 치료제가 없는 신종 에볼라 바이러스가 번지면서 현장에서는 공포심이 커지고 있다.
아프리카 질병통제예방센터(Africa CDC) 측은 "자이르형이 아닌 분디부조형은 승인된 백신이나 특화된 치료제가 전무하다"며 "초기 진단과 철저한 격리 등 일차적인 공중보건 방역 조치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은 "SK바이오사이언스 등과 협력해 자이르형 백신 50만 도즈(1회 접종분)를 확보하고 있지만, 이 백신은 분디부조형에 효능을 발휘하기 어렵다"며 대응을 위해 5천만달러(약 768억원)의 긴급 자금을 투입했다고 밝혔다.
현장 활동가들은 에볼라 초기 확산을 막지 못한 근본 원인으로 원조 축소에 따른 감시 역량 약화를 거론했다. 민간 제약사의 투자 유인이 낮은 감염병일수록 평상시 공공 재원의 연구개발(R&D) 투자가 이어졌어야 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 보건의료사업위원회 전문위원들은 "1차 보건 사업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감염병 대비 체계를 갖추는 것"이라며 "원조 삭감으로 기초 보건 체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초기 환자 식별과 차단이 지연됐다"고 짚었다.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은 DR콩고 동부 지역의 식량 지원 수혜 규모를 매월 100만명에서 60만명 수준으로 감축한 사례를 들었다. 아동 등이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면역력이 약해지면 감염병으로 인한 사망 위험성이 커질 거라고 우려했다.
지역사회의 불신은 방역을 더 어렵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에볼라 사태와 관련,NGO들이 자금을 타내기 위해 꾸민 '비즈니스'로 오해한 DR콩고 일부 지역 주민들이 보건 담당 직원들에게 물리적 공격을 가하고, 의료 서비스를 거부한 사례도 있다.
◇ 운송 비용 폭등에 난감한 단체들…한국, 보건 ODA 확대로 차별화
원조 축소 여파 속에서 중동 지역의 군사적 긴장 등 지정학적 위기는 아프리카로 향하는 물류 동맥까지 옥죄고 있다. 수송 노선이 우회되고 유가가 요동치면서 최전선 병원들은 기초적인 소모품조차 구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제실명예방 전문 NGO인 비전케어는 "현지에서 수술용 가운, 장갑, 드레이프(수술포), 주사기 등 기본적인 의료 소모품 조달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며 "동일 품목을 구매하는 데 드는 비용이 과거 대비 최소 2배 이상 폭등했다"고 토로했다.
MSF는 올해 개인보호장비(PPE)의 항공 운송 비용은 50%, 해상 운송 비용은 30%가량 각각 늘었다고 설명했다. 유니세프도 중증 영양실조 아동의 생명줄인 영양실조 치료식(RUTF) 운송 비용이 주요 노선에서 약 30% 증가해 구호 물품량이 줄었다고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보건 분야 무상 ODA(공적개발원조) 예산을 확대하며 차별화된 행보를 보인다. 양자 무상원조의 내년도 예산안 요구액을 올해보다 518억원 증액한 2천479억원(8.5%)으로 책정해 재정경제부 등과 협의하고 있다.
특히 최근 DR콩고와 우간다를 중심으로 확산하는 에볼라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긴급 인도적 지원도 검토하고 있다. 감염병 예방·진단·대응 분야에서 함께하려는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한국도 동참한다는 취지다.
정부 무상원조 전담 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은 서구의 원조 축소와 물류 대란 등 대외 악재 속에서도 직접 수행하는 아프리카 ODA 사업의 의약품 조달이나 인력 파견 등에서 현재까지 공급 차질을 겪은 특이 사례는 파악되지 않았다고 확인했다.
가나 농촌 지역의 경우 의료시설과 먼 거리, 필수 의료기기·약품 결핍 등으로 인해 기초적인 치료조차 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코이카는 북부 지역에서 '포괄적 일차보건의료체계 강화사업'을 통해 숙련 인력에 의한 분만 비율 증가 등 성과를 거뒀다.
◇ 시혜적 원조 넘어 '보건 자립'으로…대응책 모색하는 단체들
국제구호기구 등은 외부 자금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기존 인도주의 모델은 수명을 다했다고 입을 모은다. 아프리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보건 현지화'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보건 원조 재개의 대가로 아프리카 자국의 의료 데이터 제공을 압박하는 움직임에 대해 아프리카 CDC 측은 "보건 데이터 주권은 아프리카 국가와 주민에게 있다"며 강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에 대응해 GAVI는 역내 백신 생산 역량을 키우기 위해 12억달러(약 1조8천444억원) 규모의 자금 조달 기구 '아프리카 백신 제조 가속기(AVMA)'를 가동하고, 현재 13건의 백신 제조 기술 이전을 진행하며 서구 의존도 낮추기에 나섰다.
현장 NGO들의 전략적 체질 개선 작업도 분주하다. 세이브더칠드런과 굿네이버스는 예산이 끊기면 인프라 전체가 멈추는 직접 서비스 제공 방식을 지양하는 대신 현지 주민 중심의 지역사회 보건 인력 제도를 강화하는 등 역할 전환에 적극적이다.
비전케어 역시 외부 의료진의 단기 방문 수술에 의존하기보다 현지 의사가 다시 현지 의료진을 교육하는 'ToT(Training of Trainers)' 모델을 정착시켰다.
KCOC 등 현장 활동가들은 "보건 ODA는 인류를 감염병의 공포로부터 지키는 글로벌 보건 안보에 대한 가장 확실한 투자"라며 "중·저소득 국가의 '1차 보건의료망'이라는 기초 체력을 단단하게 다지는 일관된 투자가 유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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