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란 종전 양해각서(MOU) 내용 공개 뒤 전쟁 지속 여론이 높은 이스라엘은 물론 이번 전쟁에서 이란 미사일 표적이 된 데다 요금 지불 가능성으로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수출에 지장을 받게 된 걸프국에서도 불만이 나온다. 미 공화당 내 비판도 확산하고 있다.
이번 전쟁 최대 피해자로 꼽히는 걸프국들은 이란 미사일 공격의 직접적 대상이 됐을 뿐 아니라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원유를 포함한 수출길이 막혀 경제적 피해까지 입었는데 종전 양해각서는 이 두 문제 모두를 해결하지 못했다. 미사일 제한은 아예 다뤄지지 않았고 호르무즈 해협의 경우 향후 60일만 요금이 면제된다.
18일(이하 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를 보면 쿠웨이트대 역사학 교수 바데르 알사이프는 합의에서 이란 미사일과 무인기(드론)이 제외된 것은 미국이 "우리의 최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란이 이미 미사일과 무인기 역량을 재건 중이고 이번 합의로 인한 재정적 횡재를 추가 무기 구매에 사용할 거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설명했다.
미 워싱턴에 기반을 둔 싱크탱크 아랍걸프국가연구소 선임연구원 후세인 이비쉬는 이 지역 당국자들 사이에서 미국을 안보 보장국으로 신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들 국가들이 미사일과 무인기 대응 관련 한국과 우크라이나에 자문을 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또 미국이 향후 12개월 내 걸프국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이들이 미국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서서히 움직일 거라고 전망했다. 그는 다만 대안을 찾는 데는 10~20년이 걸릴 거라고도 했다.
이번 합의 결과 호르무즈 해협이 결국 이란 통제 아래 언제든 폐쇄가 반복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것은 에너지, 비료 등 수출길 위협을 받는 걸프국들의 "경제적 생존 문제"로 떠올랐다고 <로이터> 통신은 지적했다. 통신은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는 대체 경로 개발 필요성이 역내 동맹 관계까지 재편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홍해 얀부항으로 향하는 송유관, 아랍에미리트(UAE)는 호르무즈 해협 바깥 푸자이라 원유 터미널로 이어지는 송유관을 통해 이번 위기를 어느 정도 회피했지만, 지리적으로 이를 회피할 수 없는 카타르, 쿠웨이트, 이라크 등은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통신은 생산시설이 호르무즈 해협으로 통하는 남부에 집중돼 있는 이라크의 경우 지중해에 접한 인접국 시리아와 튀르키예(터키)를 거친 수출 경로 확장을 모색 중이라고 전했다. 세계 최대 규모 액화천연가스(LNG) 수출국 카타르의 경우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기 위해 사우디나 아랍에미리트로 이어지는 가스관 건설이 필요한데 이는 이들 국가들에 대한 의존을 높이는 전략적 위험을 안고 있다. 해협 우회를 위해 사우디를 통해야 하는 쿠웨이트의 경우도 비슷한 딜레마에 처해 있다.
<로이터>는 이스라엘, 걸프국 등 중동 전역 이란의 적들에겐 "이란을 더 안전하고 합법화하고 더 영향력 있게 만드는" 이번 합의가 "세기의 저주"로 보일 거라고 평가했다.
이스라엘서 "외교적 10월7일" 격한 분노…밴스 "미국이 전세계 유일 동맹" 압박
이스라엘에선 극우를 넘어 언론, 정치권에서 이번 합의에 대한 격한 분노가 표출되고 있다. 18일 <뉴욕타임스>(NYT)를 보면 이스라엘 방송 채널12 분석가 니르 드보리는 이번 합의를 "외교적 10월7일"에 비유했다. 이번 합의가 1200명이 숨지고 250명이 납치된 2023년 10월7일 가자지구 무장 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남부 공격 만큼이나 충격적이라는 의미다.
이스라엘 매체 <타임스오브이스라엘> 창립자 데이비드 호로비츠는 17일자 사설을 통해 "트럼프의 합의는 이란 침략자들에 대한 재앙적 항복"이라고 혹평했다. 그는 "이 양해각서는 협상 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이스라엘을 휴전에 묶어 두는 문구를 사용해 이스라엘을 직접적으로 제약하고 위험에 빠뜨린다"며 "트럼프의 거꾸로 된 세계관에선 이스라엘은 그의 영웅적 개입에 감사하지 않는 배은망덕한 존재"라고 비판했다. 종전 양해각서는 미국과 이란만이 아닌 "그들의 동맹들"의 군사 작전 종료도 규정한다. 이스라엘과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이끄는 리쿠드당 소속 하노크 밀위드스키 의원은 18일 소셜미디어(SNS)에 빨간 마가(MAGA·트럼프 열혈 지지층) 모자를 벗고 히브리어로 "완전한 승리"를 뜻하는 내용이 적힌 파란 모자로 갈아 쓰는 영상을 게시했다.
이스라엘 여론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18일 발표된 채널12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과의 합의에서 이스라엘 이익을 지킬 거라고 믿는 응답자는 13%에 그쳤고 대다수인 71%가 믿지 않는다고 답했다. 응답자 41%가 이스라엘이 이번 전쟁에서 패했다고 생각했고 이겼다고 느낀다는 응답은 11%에 불과했다.
이스라엘은 미국과 함께 이란 전쟁을 시작했지만 휴전 협상에선 배제됐고 이란 탄도미사일 제한, 대리세력 지원 금지 등 핵심적 요구사항을 합의문에 단 한 줄도 담지 못했다. 이에 더해 합의는 이란에 석유 수출 재개, 단계적 제재 완화, 막대한 재건 자금 확보라는 경제적 이득까지 안겨줄 가능성을 열어 뒀다.
미국과 달리 여론조사에서 국민 다수가 이란 전쟁을 지지해 온 이스라엘에서 네타냐후 총리는 이번 합의로 정치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몰렸다. 이스라엘이 레바논 영토에서 '완충 지대' 구실로 철군하지 않으며 종전 협상의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미 행정부는 이스라엘 반발을 찍어 눌렀다. JD 밴스 미 부통령은 18일 언론 브리핑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도널드 트럼프는 현 시점 전세계에서 이스라엘에 유일하게 호의적인 국가 원수"라며 "만일 내가 이스라엘 정부 내각에 있었다면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강력한 동맹을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압박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도 "미국이 없으면 이스라엘은 없었다"며 반발을 강하게 짓누른 바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란 미사일이 닿을 수 있고 2015년 이란 핵합의에 참여했던 유럽 국가들도 향후 협상에 주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공화당서 비판 확산…"3000억달러 기금 비하면 오바마가 건넨 건 푼돈"
미 공화당에서도 종전 양해각서에 대한 비판이 확산하고 있다. 공화당 소속 로저 위커 미 상원 군사위원장은 18일 성명을 내 "이란 경제 개발과 재건을 위한 3000억달러(약 459조원) 기금은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가 2015년 핵합의에 따라 이란에 건네려던 대가를 푼돈으로 보이게 한다"고 비판했다. 국방 강경파인 위커 위원장은 이란 군사작전을 재개할 것을 주장해 왔다.
<AP> 통신은 18일 양해각서가 의회에 공개된 뒤 존 튠 미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 및 마이크 라운즈 공화당 상원의원이 "현재 많은 돈이 이란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이란이 얻을 재정적 이득 및 테러 자금으로 흘러 들어가는 걸 막을 조건에 대한 명확성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8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번 합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질투심에 눈이 멀었거나 나쁜 사람들이거나 바보"라고 일축했다. 이어진 여러 게시글에서 그는 주가 상승과 유가 하락을 반복해서 합의 성공 근거로 내세웠다. 트럼프 대통령은 "레바논, 헤즈볼라,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전선에서의 완전한 휴전"을 강조했다.
미, 해상봉쇄 해제…이란 "호르무즈 건널 땐 신고를" 요금 징수 채비
이날 미·이란 양국은 양해각서 이행에 들어갔다. 미 중부사령부는 18일 이란 해상봉쇄를 해제했다고 밝혔다. 중부사령부는 성명을 통해 "오늘 미군은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란 항구 및 연안 지역을 드나드는 모든 해상 교통에 대한 봉쇄 조치를 해제했다"며 "모든 미군의 봉쇄 활동은 중단됐다"고 했다.
이란은 60일 뒤 호르무즈 해협 요금 징수 채비에 나섰다. 이란 국영 프레스TV를 보면 18일 이란 최고국가안보위원회(SNSC)는 성명을 내 "양해각서 제5항에 따라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고자 하는 상선들은 페르시아만해협청(PGSA.ir)에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양해각서에 따라 신청자는 60일간 어떤 수수료 및 요금도 부담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비용은 이란 정부가 부담한다"고 설명했다.
모즈타바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는 18일 양해각서 관련 메시지를 통해 "향후 대면 협상이 적의 견해를 받아 들이는 걸 의미하지 않는 건 분명하다"며 이후 협상에서도 강경책을 펴 나갈 것을 시사했다. 그는 자신은 애초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지만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이 이란 국민과 저항전선의 권리를 수호하겠다고 약속해 합의를 승인했다고 밝혔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절박한 심정"으로 협상에 임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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