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미국발 수출통제는 한국 산업의 외산 AI 의존이라는 민낯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빼앗기지 않을 '디지털 주권'은 대체 어디서 길러지는가. 흥미롭게도 그 답의 출발선은, 가장 더디게 움직인다고 여겨지던 공공 영역에 놓여 있다. 법도 예산도 아닌 '수요'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소버린 AI의 길을, 두 번째 이야기에서 짚는다.
지난 회차에서 우리는 워싱턴발 공문 한 장이 한국 산업의 가장 여린 살을 어떻게 헤집는지 지켜봤다. 빌려 쓰는 두뇌에 미래를 얹은 대가가 얼마나 혹독할 수 있는지도 확인했다. 질문은 자연스레 다음으로 옮겨간다. 빼앗기지 않을 '디지털 주권'을, 우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세울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첫 삽은 민간이 아니라 공공이 떠야 한다.
법은 이미 섰다, 진짜 공백은 '수요'
AI 산업의 기본 골격을 규율하는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AI기본법)'은 올해 1월 22일 이미 시행에 들어갔다. 한국은 유럽연합(EU)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포괄적인 AI 규율 체계를 갖춘 나라가 됐다. 정부 또한 2027년 자립을 목표로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에 뛰어들었고, 올해 AI 관련 예산은 10조 원대로 불어났다.
요컨대 법도, 예산도, 정책의 윤곽도 이미 섰다. 그렇다면 진짜 공백은 어디인가. 바로 '실행'이다. 더 정확히는, 애써 키운 토종 모델을 '누가 사주느냐'라는 수요의 문제다. 냉정히 보면 국산 AI의 진짜 적은 기술력의 부족이 아니다.
한국어 감수성과 현지화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되, 대규모 인프라 자본력에서 미국 빅테크와 체급 차가 엄연한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 격차는 시장 없이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사주는 이가 없으면 규모의 경제도, 기술 고도화의 체력도 길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뛰는 한전, 공공이 토종 AI의 '무대'가 되어야
민간이 AI에 굼뜬 것은 결코 아니다. 쿠팡과 이마트를 비롯한 유통 대기업은 이미 생성형 AI 도입에 사활을 걸고 질주하고 있다. 관건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 곧 그들이 올라탄 두뇌의 국적이다.
지금의 질주가 외산 트랙 위에서 이뤄지는 한, 1편에서 짚은 종속의 리스크는 가속도만 붙을 뿐이다. 이미 달리고 있는 민간을 토종 트랙으로 갈아타게 하려면, 누군가 먼저 그 길이 안전하고 효율적임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 역할을 떠맡을 적임자가 바로 공공이다.
실제로 공공은 이미 첫발을 뗐다. 한국전력은 발전부터 송·배전,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에 AI를 입히는 'KEPCO AI 대전환 로드맵'을 내놓고, 2026년 기반 조성을 시작으로 2030년 완성을 향한 단계적 전환에 착수했다.
전담 조직인 'AI혁신단'을 신설했으며, 현실의 전력망을 사이버 공간에 복제한 생성형 AI 기반 'Virtual Grid'와 업무 특화 AI 비서까지 현장에 들이고 있다. 공공기관 유일의 AI 전문 연구기관인 한전 AI연구소가 그 중심을 받친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원전에 특화한 초거대 AI를 꺼내 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핵심은 그 전환을 '무엇으로' 채우느냐다. 전력망과 원전의 운영 데이터는 국가 안보와 직결된 특급 자산이다. 이를 외산 모델에 통째로 얹는 순간 통제권은 우리 법 바깥으로 미끄러진다.
반대로 공공이 토종 소버린 AI를 선제적으로 채택한다면,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 데이터 주권을 자국 법의 테두리 안에 묶어두는 동시에, 토종 기업에는 인프라 투자비를 회수할 '매출 창구'이자 성능을 증명할 '레퍼런스'를 열어주는 것이다.
이미 일부 공공 사업에서는 토종 AI 기업이 대형 공기업의 생성형 AI 시스템 구축을 맡기 시작했다. 공공이 토종 AI의 무대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더는 구호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기술패권의 시대, 주권을 기르는 건 결국 '시장'
가을 기업공개(IPO)를 앞둔 앤스로픽에 이번 서비스 중단은 적잖은 악재이며, 경쟁사인 오픈AI 등에는 반사이익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기업의 명운과 국가의 안보 논리가 이토록 촘촘히 얽혀 있는 한, 첨단 AI를 둘러싼 통제는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는 상수(常數)에 가깝다.
역설적이게도, 미국이 채운 빗장은 다른 나라 토종 AI에는 열린 문이 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미스트랄AI가 미토스 접근이 막힌 현지 은행권 수요를 겨냥해 발 빠르게 모델 개발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통제가 만들어낸 빈자리를, 각국의 주권 AI가 시장으로 메우는 형국이다. 한국에도 똑같은 기회의 창이 열려 있다.
국회도 방향을 같이 읽는다. 구글 출신인 이해민 조국혁신당 의원은 "인재 양성과 일급기밀 수준의 서비스를 위한 자체 모델 확보, 그리고 산업의 글로벌 성장을 위한 경쟁 체제 확보"라는 '투트랙' 전략의 시급함을 강조했다. 세계와 손잡되, 유사시 홀로 설 수 있는 체력을 동시에 갖추자는 주문이다.
디지털 주권은 선언문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시장에서, 누군가 사주고 써주는 수요 위에서 비로소 자라난다. 법은 이미 섰고, 공공은 첫발을 뗐다. 이제 남은 것은 속도다. 미국과 중국이 그어놓을 경계선이 굳어버리기 전에, 공공이라는 거대한 영토를 토종 AI에 활짝 열어줄 차례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결코 넉넉하지 않다.
[폴리뉴스 조자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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