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김주현 기자]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림만이 영원토록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다.”
화려한 색채 뒤에 감춰진 한 예술가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이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마리 로랑생 회고전: 무지개 위의 춤’이 지난 4월 10일 서울 강남구 마이아트뮤지엄에서 문을 열었다.
이번 전시는 2019년 문을 닫은 일본 나가노현의 마리 로랑생 미술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회화와 드로잉, 판화 등 100여 점에 이르는 작품을 통해 작가의 예술 세계를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2017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전시 이후 오랜만에 열리는 대규모 회고전으로, 로랑생의 초기 작업부터 말년에 이르는 주요 작품들을 폭넓게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883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마리 로랑생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계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구축한 화가다. 피카소와 모딜리아니 등 수많은 예술가가 모여들었던 몽마르트르의 ‘세탁선(Bateau-Lavoir)’ 공동체에서 활동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켰다. 당시 남성 중심이었던 미술계에서 로랑생은 누구와도 닮지 않은 감성과 색채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사생아로 태어나 사회적 편견 속에서 성장했고, 젊은 시절에는 외모에 대한 열등감과 불안을 안고 살아야 했다. 또한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기욤 아폴리네르와의 만남과 이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망명 생활, 이후의 이혼 등은 그의 인생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상실과 고독이 작품 속에서는 직접적인 비극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랑생은 자신의 감정을 거칠게 드러내기보다 부드럽고 몽환적인 화면 속에 녹여냈다. 연분홍과 회색, 옅은 청색이 어우러진 특유의 색채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삶의 상처와 기억을 은유적으로 담아낸 결과물처럼 느껴진다.
전시는 크게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세탁선의 여인’, ‘잊혀진 여인’, ‘무지개 위의 춤’, ‘장미와 여인’으로 이어지는 동선은 로랑생의 예술적 변화와 삶의 흐름을 함께 보여준다. 관람객은 작품을 감상하는 동시에 한 예술가가 시대와 개인적 시련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된다. 또 회화 작품뿐 아니라 무대미술, 의상 디자인, 삽화 작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로랑생의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폭넓은 예술적 역량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
이번 자리에는 대표작 ‘키스’(1927)를 비롯해 ‘무희들’(1932), ‘푸른 옷을 입은 수잔 모로’(1940), ‘세 명의 젊은 여인들’(1953) 등이 소개된다. 특히 ‘세 명의 젊은 여인들’은 약 10년에 걸쳐 완성된 말년의 역작으로, 로랑생 특유의 색채와 인물 표현이 집약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로랑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단연 ‘색채’다. 파스텔톤의 분홍과 회색, 푸른빛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자신만의 시각 언어를 구축한 것. 오늘날에는 익숙한 색감이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독창적인 선택이었다. 이러한 색채는 여성 인물을 보다 부드럽고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로랑생만의 세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작품 속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여성과 소녀, 사슴과 말 같은 동물들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단순한 장식적 소재가 아니라 순수함과 자유, 애정의 감정을 상징하는 존재로 해석된다. 로랑생은 형태의 실험에 집중했던 동시대 화가들과는 다른 길을 걸으며 감정과 정서의 영역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확장했다.
이번 회고전은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삶의 상처와 시대적 한계를 마주하면서도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포기하지 않았던 한 여성 예술가의 여정을 되짚어 보게 한다. 부드러운 색채 뒤에 숨어 있는 고독과 회복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왜 오늘날에도 마리 로랑생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왜 죽은 물고기나 양파를 그려야 하죠? 소녀들이 훨씬 더 예쁜데요.”
문화매거진이 마이아트뮤지엄을 찾은 평일 낮에도 전시장에는 많은 관람객이 머물며 마리 로랑생의 삶과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전시는 오는 8월 23일까지 이어진다. 부드러운 색채 뒤에 숨겨진 한 예술가의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면 직접 찾아가 보는 것을 추천한다. 성인 2만 5천 원, 청소년은 1만 8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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