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권수빈 기자] 시각적 아름다움이나 물질적 결과물에 집중하던 미술의 전통적인 영역이 작가의 사상과 언어로 확장되는 과정은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꼽힌다. 형태나 재료라는 고정관념을 지우고, 창작의 배경이 되는 아이디어와 논리 체계 자체를 예술의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시각 중심의 모더니즘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며 예술의 본질적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 현대미술의 사상적 패러다임 변화를 체계적으로 추적하는 기획전시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를 오는 19일부터 10월 11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미술이 시각적 대상에서 언어와 사고의 매개체로 이동하는 과정 속에서 한국 미술계가 이룩한 개념적 전환을 조명한다. 총 28명의 작가, 14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며, 서구의 흐름과 동조하면서도 독자적인 변용을 거친 한국 개념미술의 특수성을 다각도로 살펴본다.
전시 제목인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는 한국의 개념적 미술 활동을 하나의 획일적인 규격이나 고정된 개념으로 묶어두지 않겠다는 기획적 의도를 내포한다. 작품마다 내포하고 있는 다층적인 의미와 관람객의 해석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개념미술을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려 했던 다양한 실천들로 재조명하기 위함이다. 서구 개념미술이 언어와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면 한국의 개념미술은 사유의 구조를 탐구하면서도 재료와 형태라는 물질적 조건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전시는 주제에 따라 총 네 개의 장으로 전개된다. 1부 ‘언어·논리·행위’에서는 신체 행위와 논리를 결합해 사유의 구조를 탐구한 Space & Time 조형미술학회(ST) 작가들의 대안적 실험을 다룬다. 이건용의 ‘장소의 논리’, 성능경의 ‘수축과 팽창’, 김용민의 ‘물걸레’를 비롯해 처음 공개되는 김용민 아카이브, 윤진섭의 ‘어법’, 이교준의 퍼포먼스 사진이 출품된다. 여기에 김순기의 ‘시간과 공간 1975 퍼포먼스 드로잉’, 홍명섭의 ‘디벨로핑-레벨 캐스팅’, 신체와 정체성의 문제로 탐구를 확장한 코디최의 작업이 함께 소개된다.
2부 ‘사물과 언어’에서는 언어와 사물의 불완전한 관계를 짚어내며 의미체계를 의심한 작업을 선보인다. 안규철의 ‘무명 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 김범의 ‘지렁이 공포게임’, 정서영의 ‘전망대’, 박현기의 ‘무제’와 함께 이승택, 최병소 등의 해체된 언어 작업이 출품된다. 주재환의 ‘내돈’이나 김범의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 같은 사물에 생명성을 부여하는 상상력의 결과물도 만날 수 있다. 특히 24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공성훈의 ’개념 간의 교집합’과 박이소의 ‘자본=창의력’, 김소라, 김홍석의 혼성 언어 작업은 고정되지 않는 언어의 가변성을 시사한다.
이어지는 3부 ‘지도와 측정’에서는 세상을 질서화하는 표준 체계의 객관성을 전도하고 의심하는 시도들을 모았다. 성능경의 ‘세계전도(世界顚倒)’, 김차섭의 ‘바른 방향(삼부작)’, 박이소의 ‘드넓은 세상’ 및 ‘무제(한 평(平))’, 곽덕준의 ‘3개의 계량기와 돌’, 오인환의 ‘만남의 시간’, 이건용의 ‘실내측정’을 통해 단위와 계량기가 신체와 감각, 사회적 조건에 따라 임의적이고 불안정해질 수 있음을 드러낸다.
4부 ‘기호의 조정자들’은 신문, 광고 등 기존 기호를 재배열한 김용익, 김용철, 조경숙 등의 작업과 우편·광고 유통 시스템에 개입한 김구림, 윤동천의 흐름 및 역사적 사건의 맥락을 복잡하게 재구성한 김홍석의 작품을 통해 기호 체계 뒤에 숨은 권력과 권위를 드러낸다.
전시 기간에는 출품작의 내적 개념을 심층적으로 논하는 ‘작가의 수업’이 연계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오는 8월 19일에는 국내외 미술학자들과 전문가들이 발표자로 나서는 국제 심포지엄 ‘개념과 미술: 한국과 아시아의 맥락에서’를 통해 학술적 담론의 깊이를 더할 예정이다.
관람객들은 이번 전시를 통해 개념과 언어, 행위와 제도 비판을 매개로 전개된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한 실험과 사유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뉴스컬처 권수빈 ppbn0101@nc.press
Copyright ⓒ 뉴스컬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