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연히 스레드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에 대한 긴 글을 접하고 정독했고 평범한미디어로 가져와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게시자의 허락을 맡고 전문 그대로 외부 기고를 공개합니다. <참교육>이 가져다주는 카타르시스와 문제 환기 효과가 제도 변화로 이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평범한미디어 외부 기고 윤의성] 2026년 6월 동명의 네이버 웹툰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이 공개됐다. 무너진 교육 현장을 정상적인 제도가 지키지 못하자 정부가 마지막 카드로 꺼낸 가상의 기관 ‘교권보호국’이, 교권을 침해하는 학생과 학부모와 교사를 직접 응징한다는 이야기다. 작품의 전제는 분명하다. 교권을 침해하는 자들의 문제는 지금의 법체계와 행정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이 전제는, 안타깝게도 우리가 매일 뉴스에서 확인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답답한 현실에 갇힌 사람들에게 시원한 ‘사이다’가 되기를 자처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이 단순히 사이다로 끝나지 않고 교육 구조의 개선으로 이뤄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사진=넷플릭스>
문제는 그 사이다의 작동 방식에 있다. <참교육>이 내세우는 쾌감은 세 박자로 짜인다. 첫째 기존 제도(법원/학폭위/민원 절차)는 느리고 무력하고 부패했다는 전제. 둘째 그러니 강력한 주체가 절차 바깥에서 즉각적 응징을 가한다는 해결. 셋째 응징 대상은 도덕적 복잡성이 제거된 채 ‘맞아도 싼 놈’으로 납작해진다는 점. 절차적 정의에 대한 경멸, 강한 자에 의한 질서 회복, 적의 비인간화. 이것은 권위주의 서사의 표준 문법이다. 더구나 이 작품에서 그 폭력을 수행하는 주체는 사적 자경단이 아니라 국가기관이다. ‘무력한 제도를 우회하는 사적 복수’보다 ‘초법적 권한을 부여받은 강한 국가’라는 더 위험한 판타지를 건드린다. 이 판타지의 핵심에는 한 문장 안에 숨은 미끄러짐이 있다.
지금의 제도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이 전제에는 사실 두 주장이 뭉쳐 있다. 하나는 지금의 제도가 실제로 작동을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데 경험적으로 고칠 수 있는 문제다. 두 번째는 제도란 본질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니 초법적 힘이 필요하다. 즉 폭력의 정당화다. 앞의 것은 사실이고 뒤의 것은 정당화다. 권위주의 서사의 작동 방식이 바로 이 ‘사실에서 정당화로의 미끄러짐’이며 관객이 사이다를 느끼며 환호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도 정확히 이것이다. ‘고구마와 사이다’라는 은유는 그 미끄러짐을 한 번 더 폭로한다. 그것은 제도의 실패를 소화불량으로 해결을 청량음료로 번역한다. 둘 다 구조를 건드리지 않는다. 정치적·구조적 문제를 정서적 문제로 바꿔놓고 그 해법으로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이다. 그런 후련함이 위험한 이유는, 원래라면 제도를 고칠 동력이 됐을 분노를 사이다 한 캔으로 배출해 버리기 때문이다. 응징 판타지는 개혁의 에너지를 소비로 전환하는 안전밸브로 기능한다.
그리고 <참교육>은 외딴 사례가 아니다. <모범택시>나 <비질란테> 역시 웹툰을 원작으로 한, 법이 못 한 응징을 대신하는 사적 복수의 사이다물이 줄지어 흥행했다. ‘누군가 저들을 대신 손봐줬으면’ 하는 바람은 이제 픽션 바깥으로도 번진다. 더 깊은 곳에서는 ‘회귀물’이 범람한다. 이번 생은 글렀으니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환상. 사적 복수의 판타지와 회귀의 판타지는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 느리고 정상적인 길로는 정의도, 좋은 삶도 끝내 도달할 수 없다는 체념. 누군가 대신 해줬으면 하는 마음과 차라리 판을 리셋하고 싶은 마음은 한 끗 차이이며, 둘 다 구조적 희망이 얇아진 자리에서 돋는다.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를 먼저 배우는 세대, 끊어진 사다리, 세대 간의 피로와 같이 삶의 벼랑에 가까울수록 그 체념은 깊고, 바로 그 체념이 응징의 문법이 뿌리내리는 토양이다.
‘파시즘’이라는 말부터 짚자. 여기서 그것은 검은 셔츠나 총통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의 문법을 가리킨다. 방금 말한 ‘사실에서 정당화로의 미끄러짐’ 그리고 그 미끄러짐을 들키지 않게 덮어주는 언어의 강탈. 이 둘은 한 몸이다. 폭력을 ‘교육’이라고 하고 선동을 ‘민주화’라 바꿔 부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미끄러짐은 정당해 보인다. 이 문법은 만화에서, 포고령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단어 속에서 똑같이 돌아간다. 그 첫 무대가 <참교육>이라는 단어 자체다. 교육은 본질적으로 비대칭이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아는 자와 교정받는 자.그래서 응징을 ‘교육’이라 부르는 순간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폭력이 교정으로 세탁되고(‘벌’이 아니라 ‘한 수 가르쳐준 것’) 그 단어를 쓰는 자가 스스로 교사의 자리를 점유한다. <참교육>은 묘사가 아니라 그 자체로 권력 행위다. 이 단어가 겪은 변질이 얼마나 잔인한지는, 그 역사를 알 때 비로소 드러난다. <참교육>은 본래 1989년 결성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표어였다. 입시 위주의 비인간화 교육을 개선해 ‘올바른 교육’을 실현하려던 교육민주화운동의 계승이었고, 그 구체적 내용은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이었다. 그 운동이 맞서 싸운 대상은 학생의 인권이 무시당하고 폭력이 난무하며 군대 문화가 넘쳐나던 교실이었다. 1990년 한 졸업식에서 학생들이 해직교사를 기리며 세우려던 참교육비에 새긴 문장이 그 정신을 압축한다.
참교육은 사랑을 실천하는 교육이다.
그 깃발을 든 교사들은 해직을 무릅썼고, 정부는 그들을 와해시키려 안기부와 보안사를 포함한 여러 기관을 동원했다. 다시 말해 <참교육>은 본래, 지금 그 드라마가 통쾌한 정의의 화신으로 그리는 바로 그 초법적 국가권력에게 짓밟히던 쪽의 단어였다. 한때 “교실에서 폭력을 걷어내고 인간을 사랑으로 기르자”였던 말이 이제 “잘못한 놈을 압도적 힘으로 짓이기는 것이 정의다”로 뒤집혔다. 단순한 의미의 마모가 아니라 정반대로의 역전이다. 박해받던 자의 언어가 박해자의 구호가 된 것이다. 인터넷에서 ‘참교육 영상’으로 반복 소비되며 폭력성이 단어에 스며들었고, 웹툰이 그것을 서사로 굳혔고, 이제 드라마가 국가기관 버전으로 완성한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그린 것이 정확히 이것이었다. 반대할 때 쓸 단어를 미리 폭력의 편으로 데려가 버리는 것. ‘만연’이라는 말은 본래 덩굴이 뻗어 뒤덮는다는 뜻이다. 그 덩굴이 마침내 언어의 뿌리까지 감아버린 셈이다. 이 미끄러짐은 픽션에만 머물지 않는다. 같은 문법이 정치의 최고 권좌에서 그대로 반복됐다.
2024년 12월3일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 명분은 야당의 탄핵·특검·예산삭감으로 국정이 마비됐고 종북 세력으로부터 헌정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견제(탄핵권·예산권)라는 민주주의의 정상 기능을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규정하고 그것을 군경으로 우회한 것이다. <참교육>의 영웅 나화진이 적법 절차를 장애물로 규정하고 주먹으로 우회하는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다. 사이다와 계엄은 음량만 다를 뿐 같은 문장이다. 문화가 반사신경을 훈련시키고 정치가 방아쇠를 당겼다. 덩굴은 토양에서 먼저 자라고, 그 다음에 궁궐에서 핀다. 그러나 그 밤은 동시에 두 가지를 증명했다. 무서운 것은 그 충동이 마침내 최고 권좌에까지 도달했다는 사실이고, 희망적인 것은 그것이 바로 자신이 우회하려던 견제 장치에 의해 몇 시간 만에 패배했다는 사실이다. 선포 약 두 시간 반 뒤 국회는 재석 190인 전원 찬성으로 계엄 해제를 의결했고, 시민들은 국회로 달려가 계엄군의 장갑차를 맨몸으로 막았다. 이어 국회가 204명 찬성으로 탄핵소추안을 가결했고, 2025년 4월4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인 전원 일치로 그 계엄이 위헌·위법하며 파면에 이를 만큼 중대하다고 판단해 대통령을 파면했다. <참교육> 판타지의 핵심 명제를 다시 들여다본다.
느린 견제는 너를 못 구한다, 강한 자가 필요하다.
이 명제가 생중계로 반박된 순간이었다. 강한 자가 견제를 무력으로 덮으려 했고, 견제가 이겼다. 맨손의 시민. 190대 0, 8대 0. 이 문법은 사람을 ‘적’으로 호명하는 단어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작동한다. ‘빨갱이’가 그 표본이다. 그것은 더 이상 ‘공산주의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가리킬 대상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제 가리키는 것은 ‘배제되어야 할 적’ 하나 뿐이다. 내용이 비워지고 기능만 남았다. ‘참교육’과 ‘빨갱이’는 같은 종류의 좀비 단어다. 둘 다 원래 의미는 죽었고, 그 원래 의미가 반대했을 기능에 의해 되살아나 움직인다.
공산권이 무너지고 찬양자가 사라졌는데도 이 단어가 살아 있다는 시대착오는 버그가 아니라 기능이다. 정치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 한다면, 그 적은 사악할 필요도 이데올로기적으로 일관될 필요도 없다. 그저 ‘우리’를 성립시키기 위해 ‘그들’로 묶일 대상이면 된다. ‘빨갱이’가 아무 내용이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파업하는 노동자에게도, 복지를 주장하는 시민에게도, 권력을 비판하는 자에게도 무한히 갖다 붙일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단어가 지시 대상보다 오래 산 이유는, 애초에 그 단어가 지시 대상에 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수의 이익을 챙기는 자”를 빨갱이라 부르는 순간, 이 단어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공공선이라는 관념 자체를 단속한다. 본래 ‘빨갱이’ 사냥은 가장 부자유한 국가권력의 도구였는데 이제 그것이 ‘자유’의 이름으로 공화국의 ‘공’ 자체를 공격하는 데 쓰인다. 그리고 이 단어가 단순한 욕설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짊어진 죽음의 무게에 있다.
한국 전쟁 초기, ‘빨갱이’로 분류된 수만에서 수십만으로 추정되는 민간인이 재판 없이 학살됐다. ‘빨갱이’라 불린다는 것은 시민·인간으로서의 보호 바깥으로 추방된다는 뜻이었다. 죽여도 살인이 아닌 존재. 그래서 이 단어가 오늘 가볍게 던져질 때조차, 그것은 그 저수지에서 물을 길어 온다. 여기서 한 가지 규율이 필요하다. 호명의 문법을 비판하는 글은 스스로 적을 호명해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 혐오의 정치에 긴 그림자가 있는 것은 사실이고, 친일 청산의 실패부터 군부 권위주의, 선거철마다 북한 위협을 이용한 ‘북풍’까지 그 책임은 분명히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의 단일한 혈통으로 환원하거나 ‘저쪽 진영=파시스트’로 수렴시키는 순간, 글은 자기가 비판하던 그 기계를 거울처럼 작동시킨다. 그 ‘사실에서 정당화로의’ 엔진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돈이 실제로 북으로 건너간 대북송금은 이 서사의 반대편에 있다. 표적은 진영이 아니라 문법이다.
그리고 이 문법은 우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흔히 ‘진보’로 분류되지만 정작 진보의 기능은 자주 멈춰 서 있는 민주당 역시 같은 적을 호명하는 반사신경에서 자유롭지 않다. 다만 한 정치체의 건강은 그 이름표가 아니라 항체(내부 비판과 자정작용)가 살아 있느냐로 갈린다. 어느 편이 조금이라도 나은가는 진영이 아니라 그 자정 능력으로 가려야 한다. 더구나 그 엔진이 겨눈다는 ‘공산주의’라는 적조차 이미 실체가 없다. 북한은 진작 공산주의 기획이기를 멈췄다. 백두혈통 세습과 선군으로 굴러가는 군사적 세습 독재일 뿐, 평양에서조차 공산주의는 거의 죽었다. 안보 위협은 진짜이되, ‘빨갱이와 멸공’이 호명하는 공산주의라는 적은 허깨비다. 이 텅 빈 적개심의 정체는 한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SNS에 ‘멸공’을 적으며 반공을 과시하던 신세계그룹 정용진 회장의 스타벅스 코리아는, 2026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에 스타벅스 ‘탱크데이’ 마케팅으로 광주의 탱크와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책상을 탁 치니…”)를 환기하는 초유의 논란을 일으켰다. 사과와 대표 해임, 5.18 단체의 고소가 이어졌다. 멸공을 부르짖으며 반전체주의를 연기하던 자의 회사가, 정작 우리 땅에서 벌어진 진짜 전체주의 폭력의 피해자를 조롱한 것이다.
이것이 증거다. 멸공은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였던 적이 없다. 외국의 전체주의 유령에는 핏대를 세우면서 국내 군부 폭력의 기억은 마케팅 소재로 희롱하는 까닭은, 적이 처음부터 이념이 아니라 ‘우리가 미워해도 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멸공을 외치며 중국과 거래하는 모순도, 독재를 찬양하며 민주주의를 내거는 모순도, 태극기 옆에 성조기를 흔드는 모순도 같은 진실을 가리킨다. 한국의 극우에겐 국가주의가 없다. 고전적 파시즘은 괴물 같을지언정 기획이 있었다. 강한 민족, 강한 국가, 민족 재생의 신화. 그러나 이들에겐 그 적극적 기획이 없다. 비일관성은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본질이다. 국가주의가 없으니 일관될 국가가 없고, 유일한 일관성은 ‘적’뿐이다. 진짜 국가주의라면 남의 나라 국기를 흔들 리 없다. 그러므로 가장 정확한 이름은 내용 없는 파시즘, 파시즘의 문법만 남은 것이다. 원한이 정치를 대신한다. 반박할 강령이 없어 고전 파시즘보다 다루기 어렵지만, 건설할줄 모르고 오직 포위할 줄만 알기에 더 약하기도 하다. 그것은 전적으로 항체가 무너지느냐에 의존한다. 그 원한이 가장 편안하게 사는 곳은 정치도 거리도 아니다. 놀이다. 일베를 비롯한 커뮤니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오래도록 조롱의 소재였다. 그의 죽음마저 ‘드립’과 밈이 되어 웃음거리로 소비됐다. 여기서 ‘놀이’는 ‘교육’이나 ‘민주화’와 똑같은 세탁어다. 잔혹을 농담으로 개명하는 순간, 그것은 반박조차 면제받는다.
그냥 드립인데 왜 진지하냐?
더구나 죽은 자를 향한 조롱에는 ‘맞아도 싼 놈’이라는 알리바이조차 없다. 남는 것은 적을 깎아내리는 쾌감 그 자체, 곧 놀이가 된 원한 뿐이다. 그리고 놀이라는 형식이야말로 이 문법이 정치 밑으로, 일상의 모세혈관 끝까지 마찰 없이 번지는 통로다. 그 거울상은 반대편에도 있었다. 페미니즘을 표방한 메갈리아는 자신들의 혐오와 조롱을 일베식 여성혐오에 대한 ‘미러링’이라 불렀다. 여성혐오가 실재한다는 출발점은 정당했다. 그러나 ‘미러링’ 역시 ‘참교육’·‘놀이’·‘민주화’와 같은 계열의 세탁어다. 내 증오를 ‘되비추기’라 부르는 순간 그것은 비판으로 포장된다. 호명 기계가 정반대 진영에서, 저마다 다른 명분의 단어를 달고 돌아간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병은 좌도 우도,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그것은 문법이며 그 문법은 자신을 정당해 보이게 할 단어 하나만 쥐여주면 어느 손에서나 돌아간다.
그리고 2026년 6월 이 문법이 거리에서 그대로 상연됐다. 제9회 지방선거 본투표 중 서울 송파·강남 등 14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동나 투표가 일시 중단되는 초유의 행정 실패가 벌어졌다. 그 직후 시민들이 과천 중앙선관위 청사와 올림픽공원 개표소를 봉쇄했다. 재선거를 요구하며 개표를 막았고 선관위 직원 수십 명이 안에 고립됐으며, 취재하던 기자단은 “선관위 직원이 아님을 증명하라”는 요구와 함께 폭행당했다. 가장 섬뜩한 장면은 핸드볼 경기장에서 나왔다. 하필 그 개표소가 차려진 경기장에 훈련 장비를 두고 있던 여자 유소년 핸드볼 국가대표 선수들이, 장비를 꺼내러 왔다가 시위대에 가로막혔다.
핸드볼 선수인줄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이런 추궁이 돌아왔고 시위대는 태극마크를 단 미성년 선수들의 가방을 일일이 열어 검사했다. 누군가는 “양말도 벗겨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무죄를 증명하라는 요구, 재판관이 된 군중, 집단으로 가해지는 의심. 이것이 중국 홍위병의 투쟁대회를 그대로 축소한 안무다. 류츠신이 ‘삼체’를 문화대혁명의 투쟁대회 장면으로 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책의 진짜 공포는 외계인이 아니라 이념이 ‘적’의 파괴를 허가했을 때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짓이다. 그 투쟁대회는 스스로를 ‘재교육’이라 불렀다. 지식인을 군중 앞에 세워 때려죽이면서 그것을 ‘교육’이라 명명했다. ‘참교육’이라는 개념의 정점이 거기 있다. 물론 처음부터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초기엔 “부정선거가 아니라 부실선거”라며 선관위의 시스템 실패만을 겨냥하고 “재선거만 외치자”는 자율 수칙으로 음모론과 선을 그은 이들도 분명 있었다. 정당한 책임 추궁이었다. 그러나 그 수칙은 곧 찢겼다. 부정선거 구호가 되돌아왔고, 군중의 구성도 바뀌었다. 핸드볼 선수를 둘러싼 그 장면처럼, 본래의 정당한 메시지는 의심과 색출의 문법에 삼켜져 변질됐다. 그리고 이들은 그 봉쇄를 ‘민주화운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다만 비유는 문법의 차원에 묶어두어야 한다. 1966년의 홍위병은 국가가 풀어놓은 수백만 규모의, 십년에 걸친 운동이었다. 2026년의 군중에게는 국가와 시스템이 등 뒤에 없다. 경찰이 옆에 있었고, 개표는 끝내 진행됐다. 문화대혁명에는 항체가 없었다. 국가가 곧 군중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비유의 올바른 용법은 “한국이 문화대혁명이다”가 아니라 “항체가 무너지면 군중은 저 안무를 향해 간다”는 경고다. 정당한 책임 추궁의 자율 수칙이 하루아침에 찢기던 그 속도가 바로 그 경고의 실물이다. 이들이 과연 ‘잠실 민주화운동’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 시도 자체가 공허를 자백한다. 선거를 뒤엎으려는 군중을 ‘민주화운동’이라 부른다는 것은, 그 단어의 의미와 자신이 아무 관계가 없음을 고백하는 일이다. 진짜 기획이 있는 운동은 ‘민주화’를 훔칠 필요가 없다. 스스로를 명명하니까. 절도는 공허의 증상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희망이 있다. ‘민주화’는 ‘참교육’처럼 깨끗하게 훔칠 수 없다. 참교육은 원뜻이 잊혀졌기에 강탈당했지만 민주화에는 임자가 있다. 5·18과 6월 항쟁, 이한열과 박종철, 실제로 그 단어를 위해 죽은 사람들. 너무 많은 이가 그 값을 기억하기에 그 단어는 쉽게 도둑맞지 않는다. 기억이 곧 방어다.
오해는 말자. 이 글은 드라마 <참교육>을 보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보기를. 그래서 무너진 교육 현장이라는 의제가 공론의 테이블에 오르기를 바란다. 경계하는 것은 단 하나다. <참교육>이 신드롬처럼 유행어처럼 번지며 카타르시스로 소비되는 것. 그 분노가 사이다 한 캔으로 증발하는 것. 바라는 것은 정반대다. 드라마가 가리킨 구조적 문제를 우리가 더 오래 바라보고 끝내 이겨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한복판에는 사람이 있다. 드라마 안에도 그리고 무엇보다 화면 밖에도 주먹 대신 인내로 교권과 학습권을 지켜내는 진짜 어른들이 있다. 묵묵히 버티는 다수의 교사들이다. 안타까운 현실은 이들을 가로막는 손도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사이다가 정작 향해야 할 곳은 가해자를 짓이기는 환상이 아니라 바로 이 교사들을 실제로 지켜내는 제도다. 그 조용한 버팀이야말로 어떤 주먹보다도 ‘사랑을 실천하는 교육’이라는 참교육의 본뜻에 가깝다.
그러니 결국 이번 선관위 사태의 본질도 시스템이다. 선관위는 실제로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헌법기관이라는 지위 뒤에서 외부 감사를 회피해온 점, 과거의 자녀 특혜 채용, 임기가 끝난 위원장의 유임 그리고 이번의 용지 부족까지. 이것은 음모가 아니라 관리·책임 구조의 실패다. 올바른 대응은 두 개의 가짜 길 사이에 있다. 군중처럼 힘으로 개표를 뒤엎는 것도 아니고 “저 극우가 떠드는 거니까”라며 실패 자체를 덮는 것도 아니다. 선관위의 감사·독립성·역량 구조를 지루하게 제도적으로 끝까지 손보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다. 교육이든 선거든 드라마가 비춘 몇몇 장면이 해결된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훨씬 복합적이고 한 세대에 걸쳐 더디게 풀리는 문제다. 그러나 바로 그 복잡함이야말로 사이다가 결코 줄 수 없고 오직 지루한 제도와 시간만이 감당하는 영역이다. 통쾌하지 않고, 카타르시스도 없고, 화면에 담기지도 않는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며, 만연화된 파시즘에 대한 유일한 진짜 항체다.
부실을 부정으로, 견제를 장애물로, 이웃을 적으로, 폭력을 교육으로, 선거 뒤엎기를 민주화로 번역하기를 끝내 거부하는 것. 단어를 그 의미에 붙들어 매는 그 일이 곧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다. 그리고 그 규율은 좌우 누구에게도 면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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