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슨코리아 강대현 공동대표가 16일 경기 성남 넥슨코리아 사옥에서 막을 올린 넥슨 개발자 콘퍼런스(NDC) 26 기조연설에서 '구현이 쉬워지는 시대, 우리는 무엇으로 경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가 24분의 연설 끝에 남긴 답은 이 한 문장이다. 맥락의 복리다.
강 대표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코드 작성과 이미지 제작, 사운드 제작 비용을 빠르게 0에 가깝게 끌어내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 하나를 덧붙였다. 쉬워지는 건 우리만이 아니라 모두라는 것, 그리고 유저의 하루는 여전히 24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는 넷플릭스를 켜고 30분 동안 스크롤만 하다 아무것도 못 고른 채 꺼 버린 경험을 예로 들며, 볼 게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고르기 어려워지는 역설이 지금 게임 시장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근거로 제시한 수치가 있다. 스팀 신작은 2015년 약 2800개에서 2025년 약 2만 개로 10년 만에 7배 늘었지만, 이 가운데 리뷰 1000개를 넘기며 폭넓은 주목을 받은 게임은 608개, 전체의 3% 수준에 그쳤다. 2024년 PC·콘솔 플레이타임의 57%는 출시 6년이 지난 게임에 몰렸다. 플레이어의 시간 절반 이상이 신작이 아니라 기존 게임으로 흘러간다는 의미다. 스팀 동시 접속은 올 3월 4200만 명을 넘어 역대 최고를 찍었고 업계 추정 매출도 사상 최대였지만, 비슷한 시기 게임 분야 초기 단계 투자는 수년 내 최저로 떨어졌다. 한쪽은 역대 최고, 다른 한쪽은 수년 내 최저. 시장은 커지는데 성공의 문은 좁아진다는 진단이다.
그가 무게 중심이 옮겨 간다고 본 곳이 '맥락'이다. 1865년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가 짚은 역설을 끌어왔다. 증기기관 효율이 좋아지면 석탄을 덜 쓸 줄 알았는데 결과는 정반대였고, 엄두도 못 내던 이들까지 기관을 들이면서 석탄 소비가 폭증했다는 이야기다. 일이 쉬워진다고 경쟁이 끝나는 게 아니라 판이 커지고 경쟁이 벌어지는 공간이 바뀐다는 것이다. 게임업계도 이미 여러 번 겪었다. 엔진을 직접 만드는 일이 기술력의 척도였던 시절, 상용 엔진이 보편화되자 무게 중심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즉 아트와 콘텐츠로 넘어갔다. 패키지를 유통망에 올리는 것 자체가 장벽이던 시절, 디지털 유통이 그 벽을 허물자 이번엔 2만 개 속에서 발견되고 선택받는 일이 가장 치열한 싸움터가 됐다. 누구나 쉬워진 일은 더 이상 우열을 가르지 못한다는 결론이다.
맥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강 대표는 모자 하나로 설명했다. 범용 AI에게 메이플 캐릭터에 씌울 귀여운 모자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 그럴듯한 모자가 나온다. 그러나 20년간 메이플스토리를 즐겨 온 유저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아끼는지에 대한 이해를 얹으면, 비로소 메이플스토리다운 모자가 나온다. 게다가 앞의 모자는 그럴싸해도 메이플 아바타가 실제로 쓸 수 없는 모자다.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이 맥락이고, 스타일 가이드처럼 데이터로 옮길 수 있는 맥락은 AI가 점점 더 잘 다루겠지만 유저와 주고받아 온 관계, 지켜 온 시간, 쌓인 신뢰는 데이터만으로 옮겨지지 않는다고 그는 선을 그었다.
핵심 개념이 여기서 나온다. '맥락 자본'이다. 개발사가 장르를 파며 쌓은 판단과 운영 데이터, 밸런스 노하우가 만드는 쪽의 맥락이라면, 유저끼리 맺은 관계와 커뮤니티가 함께 기억하는 사건이 즐기는 쪽의 맥락이다. 강 대표는 이를 돈으로 살 수 없고 프롬프트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오직 시간으로만 쌓이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누구나 사서 쓸 수 있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과 시간으로만 쌓이는 '축적된 지능(Accumulated Intelligence)'을 같은 'AI' 두 글자로 겹쳐 부르며, 첫 번째 AI를 누구보다 잘 쓰면서 그 위에 두 번째 AI를 두텁게 쌓는 일을 과제로 내놨다. 첫 번째 AI는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기에, 바로 그 평등함 때문에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연설의 무게 중심은 단리와 복리의 차이로 옮겨 간다. 같은 20년을 만들어도 어떤 스튜디오는 작품을 낼 때마다 팬이 깊어지는데, 어떤 스튜디오는 매번 처음부터 자기를 다시 설명한다. 같은 20년을 운영해도 어떤 게임은 유저의 일상에 스며들고, 어떤 게임은 예전에 재밌었다는 추억으로만 남는다. 강 대표는 이 격차를 만드는 것이 원금의 크기가 아니라 이자율, 곧 경험을 쌓는 방식이라고 못 박았다. 전작에서 배운 것이 다음 작품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단리이고, 만드는 쪽의 경험이 다음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고 즐기는 쪽의 경험이 게임 밖으로까지 번져 서로를 키우면 복리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작은 팀에게 길이 있다고 했다. 복리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은 원금이 아니라 이자율이기에, 결정이 빠르고 유저와 거리가 가까운 작은 팀은 오늘 배운 것을 내일 곧장 자기 게임에 재투자할 수 있어 이자율에서는 오히려 유리하다는 논리다. 한때 파산 위기까지 갔던 스튜디오, 2006년 출시 당시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로블록스가 지금 자리에 오른 것은 시작이 커서가 아니라 작은 경험 하나도 흘려보내지 않고 다음 작품, 다음 유저에게로 이어 붙였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그래서 진짜 싸움은 구현의 경쟁이 아니라 복리 구조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의 경쟁이라는 것이다. 거꾸로, 아무리 큰 원금도 단리로만 굴리면 제자리이고, 넥슨이 가진 20년의 맥락 역시 완성된 자산이 아니라 오늘 쌓기를 멈추는 순간 빛이 바래는 자산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넥슨이 대형 오프라인 행사를 멈추지 않는 배경도 같은 구조에 닿아 있다. 강 대표가 직접 든 사례가 그 연결을 드러낸다. 롯데월드 전관 대관 행사에서 1만 석 1차 예매가 30초 만에 마감되고, BTS 협업 이벤트에 유저가 한꺼번에 몰린 일을 두고 그는 20년간 쌓인 관계가 한순간에 터진 결과라고 설명했다.
2009년 메이플스토리 커닝시티에서 이벤트 보따리를 열자 초고레벨 보스가 튀어나와 마을이 아수라장이 된 사건은, 회사가 기획한 콘텐츠가 아니었는데도 유저들이 '커닝시티 대참사'라 이름 붙이며 15년 넘게 회자되는 문화로 남았고, 2023년 말에는 유저 창작팀이 그 장면을 직접 재현해 올리기까지 했다. 한 게임을 5년간 함께 즐긴 커플이 게임 속 추억과 함께 결혼 소식을 전해 온 일도 사례로 들었다. 회사가 만든 것은 무대였고 삶은 유저가 채웠다는 것이다. 대규모 오프라인 행사와 커뮤니티 운영은 그 맥락을 복리로 키우는 장치인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데이터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판단도 짚었다. 특정 보스에서 유저가 계속 막힌다는 데이터만 보면 난이도를 낮추는 게 답이지만, 커뮤니티에서 유저들이 공략을 나누고 클리어 영상을 자랑하며 함께 축하하고 있다면 그 보스는 골칫거리가 아니라 게임의 문화라는 것이다. 난이도를 낮추는 순간 그 문화를 손수 죽이는 셈이 된다. 강 대표는 축구를 빗대기도 했다. 축구를 직접 뛰는 사람보다 보고 응원하고 게임으로 먼저 만나는 사람이 훨씬 많고, 그렇게 흩어진 경험이 축구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150년간 복리로 쌓였다는 것이다. 진정한 격차는 재미의 크기가 아니라 경험이 복리로 쌓이는 세계가 있느냐 없느냐에서 생긴다고 그는 정리했다.
강 대표는 게임이 출력물이 아니라 약속이라고도 했다. 라이브 게임에는 이 세계가 계속된다는 약속으로, 패키지 게임에는 완성된 세계가 언제까지나 기다린다는 약속으로 작동하며, AI는 출력물을 점점 더 잘 만들겠지만 약속만은 출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중요한 건 시작점의 크기가 아니라 오늘 쌓기 시작했는지라는 말로 연설을 맺었다. 8년 전 같은 무대에서 컬링을 재미없는 스포츠로 여겼다는 고백으로 시작했던 그는, '경기는 그대로여도 맥락은 새 세계를 만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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