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시계로 잴 수 없는 노동시간[김덕호의 갈등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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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시계로 잴 수 없는 노동시간[김덕호의 갈등사회]

이데일리 2026-06-15 05:0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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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호 성균관대 교수·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상임위원]밤 11시 한 직장인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한다. “내일 아침 회의 자료, 지금 한 번 봐줄 수 있을까요” 그는 이미 퇴근했지만 업무는 끝나지 않았다. 같은 시각 또 다른 누군가는 내일 출근할 아르바이트 시간을 확인한다. 이번 주에도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충분치 않다. 누군가는 일을 멈출 수 없고 누군가는 일을 시작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 노동시장의 모습이다. 한쪽에선 과도한 업무량과 끊이지 않는 업무 연락에 지친 노동자들이 번아웃을 호소하고 다른 한쪽에선 단 한 시간의 일이라도 더 얻지 못해 생계를 걱정한다. 평균 노동시간은 줄어드는데 왜 피로와 불안은 함께 커지는가.

과로와 초단시간 노동은 정반대의 현상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구조가 만든 두 얼굴이다. 비용과 효율의 논리 속에서 어떤 이에게는 과도한 시간이 몰리고 어떤 이에게는 필요한 시간조차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

주52시간제는 장시간 노동을 당연시하던 한국 사회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법이 시간을 줄였다고 일이 함께 줄어든 것은 아니다. 인력 구조와 성과 압박, 납기 일정이 그대로라면 일은 다른 경로를 찾는다. 업무 밀도는 높아지고 일부 업무는 조직 밖으로 밀려난다.

포괄임금제는 실제 노동시간을 보이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본래 포괄임금은 근로시간 산정이 어려운 업무에 적용되는 예외적 방식이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노동시간의 가시성을 흐리는 수단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시간이 기록에서 사라지면 초과노동은 보이지 않게 되고 노동은 개인의 헌신 문제로 치환되기 쉽다.

다른 한편에는 초단시간 노동이 있다. 한국 노동시장에서 주 15시간은 하나의 경계선이다. 이 기준을 넘으면 주휴수당이 발생한다. 일부 영세 사업장에서는 주휴수당 부담을 피하기 위해 근무 시간을 14시간대에 맞추기도 한다. 사업주는 비용 부담을 호소하고 노동자는 단 30분의 벽 앞에서 보호 밖으로 밀려난다. 누구 한쪽만의 잘못이 아니다. 제도 설계의 문제다.

시간이 쪼개지면 임금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경력도 쌓이지 않고 사회보험 적용도 제한된다. 숙련을 형성할 시간도 사라진다. 특히 청년, 여성, 고령층은 이런 불안정한 노동시간을 가장 먼저 떠안게 된다.

그렇다고 규제를 강화하는 것만이 해법은 아니다. 한국의 근로시간 제도는 장시간 노동을 막는 데 초점을 맞춰 왔지만 산업과 직무의 특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연구개발, 콘텐츠 제작, 글로벌 프로젝트처럼 특정 시기에 일이 몰리는 직무가 있는 반면 제조나 돌봄처럼 안정적인 교대와 회복 시간이 중요한 직무도 있다. 모든 직무에 하나의 시계만 채울 수는 없다.

현장의 어려움은 더 구체적이다. 현행 근로시간 유연화 제도는 활용 요건이 까다로워 성수기나 연구개발, 프로젝트 업무에 충분히 대응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근로자대표와의 서면합의 요건도 장벽이 되곤 한다. 근로시간 개편 논의가 단순히 ‘더 오래 일하자는 주장’으로만 소비돼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핵심은 근로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산업과 직무에 맞게 시간을 설계하는 데 있다.

노동시간에도 성벽이 있다. 대기업 정규직의 시간은 두텁게 보호된다. 반면 5인 미만 사업장과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의 시간은 여전히 보호의 바깥에 놓여 있다. 누군가는 엄격한 시간 규제의 보호를 받고 누군가는 규제 밖의 장시간 노동이나 초단시간 노동을 감내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는 자연 현상이 아니라 제도에 의해 선별적으로 보호되는 자원이 됐다.

노동시간 정책은 더 이상 총량 규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장시간 노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과로를 막는 건강권 보호, 최소한의 노동시간 보장, 산업과 직무 특성을 반영한 유연성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 모든 노동에 같은 시계를 채우는 것이 공정은 아니다. 서로 다른 노동에 맞는 시계를 설계하는 것이 진짜 공정이다.

시간은 가장 조용한 권력이다. 누구의 노동시간도 쉽게 소진되거나 증발해서는 안 된다. 하나의 시계로는 더 이상 노동시장을 설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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