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습니다"라는 대통령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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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 없습니다"라는 대통령께

프레시안 2026-06-14 11:51:0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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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이재명 대통령이 X(옛 트위터)에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다"는 글을 올렸다. 정부의 소송비용 회수 조치에 노동자들이 "이것이 비정상의 정상화냐"고 항의하자 직접 답변을 밝혔다. 소송비용 청구는 윤석열 정부 당시 집회 강제 해산으로 기본권을 침해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제기한 국가 손배소에서 비롯됐다. 이에 당시 진압 피해자였던 한 노동자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내왔다.(☞ 관련기사 보기)

5월 10일, 일요일이었습니다. 집 소파에 누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아파트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문을 열고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낯선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인 줄 알았습니다. 그는 퉁명하게 두꺼운 봉투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법원에서 나왔습니다. 차헌호 씨 본인 맞나요?"

순간, 일요일의 달콤함이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식탁에 앉아 서류봉투를 뜯었습니다. 소송비용액확정 신청서, 법원의 판결문, 소송비용 계산서 등이 들어있었습니다. 대충 읽는데도 한참이 걸렸습니다. 행복한 일요일은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저는 일본기업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으로 6년을 일했습니다. 2015년 5월,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자마자 한 달 만에 해고됐습니다. 대법원 판결까지 9년 2개월이 걸렸습니다. 10년을 지회장으로 싸웠습니다.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동굴을 더듬어 나가는 일과 같았습니다. 2019년, 4년 만에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에서 회사의 불법파견 혐의 기소가 결정되는 순간, 구미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해고자로 살면서 사법부의 판단을 받아내는 일은 심장이 쪼그라드는 통증을 진통제 없이 견디는 일이었습니다.

법원은 신속하게 판결하지 않았습니다. 재판을 질질 끌었습니다. 포스코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불법파견 확정받는데 11년 2개월이 걸렸습니다. 강산이 바뀌고도 남을 시간입니다. 아사히글라스 부당노동행위 사건도 대법원에 상고된 뒤 6년이 돼서야 판결했습니다. 한국GM 비정규직은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이 8년 걸렸고, 현대제철 당진공장 노동자들 역시 7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차헌호 씨가 지난 5월 송달받은 소송비 청구 자료 중 일부. ⓒ차헌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23년 5월 25일 대법원 앞에서 문화제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무대 차량을 견인하고 참가자들을 연행하며 집회를 폭력적으로 해산했습니다. 6월 9일과 7월 7일에 열린 문화제 역시 같은 방식으로 강제 해산시켰습니다. 저는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에 갔습니다. 다행히 하루 뒤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날 헌법이 보장한 집회·결사의 자유는 공권력에 의해 심각하게 침해당했습니다. "불법에 엄정 대응하라"는 윤석열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국가를 상대로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법원은 우리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사이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윤석열 정권의 집회·시위 탄압을 '헌법적 권리의 침해'라 비판했던 민주당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바뀐 정권의 법무부는 윤석열의 국가폭력을 바로잡기는커녕, 집행관이 되어 소송비용을 청구했습니다. 일요일 날 제가 받은 법원의 서류에 신청인이 '대한민국 법무부장관 정성호'라고 찍혀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대통령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현재 법이 그렇습니다"라고 SNS에 입장을 밝혔습니다.(☞ 관련기사 보기)

'정말 대통령이 쓴 글이 맞나?' 의심이 들었습니다. 얼마 후 수많은 기사가 한꺼번에 쏟아졌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은 '이재명 대통령은 왜 직접 이런 글을 올렸을까'였습니다. <프레시안> 기사를 보고 억울함을 느낀 것인지, 기사 속 어떤 표현이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노동운동 열심히 하라던 분이, 언론에 올바른 말은 수없이 쏟아낸 대통령께서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법원의 판결이 끝나면, 어떤 사건이든 정말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정치는 왜 하십니까?"

대통령께 묻고 싶습니다. 정부의 행정권한은 억울한 일을 바로잡고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는 데 쓰라고 주어진 것 아닙니까? 당신은 행정부의 수반이고, 늘 행정이 공직자의 편의가 아니라 국민의 불편과 불합리를 해결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그런 분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다"니요. 더욱이 소송비용을 집행하지 않을 경우 직무유기에 해당한다는 변명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행정편의주의로 느껴집니다.

대통령님, 스스로 지난 정권의 표적수사로 오랫동안 법적 탄압을 받아온 억울함을 때때로 호소하셨지요. 그래서 정부·여당은 부당한 기소에 공소취소까지 할 수 있는 법을 통과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은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까?

▲2023년 7월 8일 경찰이 서울 중구 파이낸스빌딩 앞 인도에서 새벽까지 진행된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공동투쟁) 노숙집회 참가자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있다. ⓒ연합뉴스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대표도 '소송비용 청구서'를 받았습니다. 대통령의 입장을 보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바로 SNS에 글을 올렸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법으로 보장된 노동삼권을 행사했을 뿐인데, 이번 일처럼 단체행동권을 불법으로 '입틀막'하면 앞으로 수천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기업 탄압은 어떻게 해결하란 말인가? 민주국가에서 의사 표현할 권리도 보장 못 한단 말인가?"

청구서를 받은 비정규직 동지들은 모두 잔뜩 화가 나 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직접 나서 "어쩔 수가 없다"고 하니 그 말을 들은 당사자들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입니다.

대통령이 피해자들에게 보여야 할 최소한의 책임은 "어쩔 수가 없다"가 아닙니다. 소송비용 청구를 취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입니다. 국가폭력에 맞서 헌법상 권리를 주장한 시민과 노동자들에게 소송비용을 청구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행사를 위축시키고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후퇴시키는 일입니다. 윤석열의 잘못된 국가폭력을 그대로 이어받아 집행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말씀처럼 법이 필요합니다. 공익소송에 대한 제도개선이 필요합니다. 최소한 법이라도 바로 만들겠다고 해야지요. 노동, 환경, 장애인, 차별 시정 사건 등에 특별 규정 적용하는 행정부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의지만 있다면, 지금 당장 소송비용 청구 취소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사이다 발언에 그치지 말고,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는 행동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6월 16일 낮 12시, 청와대 앞에서 소송비용 청구서를 받은 123명의 당사자가 기자회견을 엽니다. 소송비용 청구 철회를 촉구하며 청와대에 요구서를 전달할 예정입니다. 123명은 국가폭력으로 발생한 소송비용 청구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소송비용 청구 취소를 요청합니다.

-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소집권자 차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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