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연합뉴스) 백나리 특파원 = "떼어내라!, 떼어내라!"
금요일인 12일(현지시간) 늦은 밤 워싱턴DC의 대표 공연장 케네디센터 앞에서 수백명의 시민이 소리쳤습니다.
늦은 밤에 나다니는 것이 한국만큼 안전하지 않은 미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밤 12시가 다 된 시간에 밖에 나와 있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케네디센터의 흰색 대리석 외벽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이 철거되는 걸 직접 보러온 사람들입니다.
1971년 세워져 반세기 넘게 '존 F. 케네디 공연예술센터'였던 이곳이 작년 12월 '도널드 트럼프와 존 F. 케네디 공연예술센터'로 바뀌었는데 법원에서 지난달 말 트럼프의 이름을 떼어내라는 판결이 나온 겁니다.
이날은 판결이 집행돼야 하는 마지막날이었습니다. 12일 밤 12시까지 외벽이든 어디에서든 '트럼프'를 들어내야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수장(이사장)이고, 그의 측근들이 다수 포진한 케네디센터 이사회가 막판까지 집행정지 신청을 하며 버텼지만 법원의 판단은 같았습니다.
인부들이 비계를 세우고 '도널드 트럼프'를 떼어낼 준비를 하는 동안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반겼습니다. '당신은 존 F. 케네디가 아니야'라는 팻말을 들고 흔드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밤 12시에는 시민들이 다 같이 카운트다운을 하며 법원의 철거 시한을 기념했습니다. 암살의 비극으로 생을 마감하면서 미국 국민에게 각별한 존재로 남은 케네디의 이름 위에 별안간 현직 대통령의 이름이 얹히는 것을 지켜보며 느꼈을 혼란과 분노가 카운트다운에 그대로 담겼습니다.
악천후로 13일 정오까지 철거 작업을 마치겠다는 케네디센터의 요청이 심야에 받아들여지면서 시민들은 아쉽게 자리를 떴습니다. 인부들이 외벽에 대형 가림막을 치고 철거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지난 2월말 워싱턴DC에 부임하고 며칠 뒤 케네디센터에 공연을 보러 갔었습니다. 마침 좋아하는 연주자의 공연이 있었고 '트럼프'의 이름이 붙은 케네디센터가 어떻게 변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앉아서 공연 시작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연주자와 협연하는 국립교향악단 단원들이 일어섰습니다. 국립교향악단의 연주에 맞춰 관객들도 일어서 미국 국가를 불렀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관객도 여럿 보였습니다. 클래식 공연에 앞서 국가를 제창한다니 생소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는 길에 좌석 안내를 해주던 직원에게 물었더니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한 이후 지침이 내려왔다며 착잡해했습니다. 케네디센터에서 오래 일을 했지만 이렇게 행정부의 입김이 강한 적은 없었다는 겁니다.
그로부터 3개월여가 지나 케네디센터는 일단 트럼프의 이름을 떼고 다시 제 이름을 찾았습니다. 여러 예술가가 공연을 취소해버려서 케네디센터는 7월부터 개보수를 내세워 아예 공연장을 폐쇄하겠다는 계획입니다.
법원에서 개보수 계획도 일부 제동이 걸렸지만 이미 공연 일정은 7월부터 싹 비워진 상태입니다.
케네디센터 안에는 케네디의 흉상이 서 있습니다. 수십년간 수많은 예술가와 관객을 맞이하던 케네디의 흉상은 한동안 혼자 외롭게 서 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케네디는 생전에 암살의 운명에 직면하게 될 줄 몰랐겠지만 사후에 이런 홍역을 치르게 될 줄도 몰랐을 겁니다. 덩달아 워싱턴DC 주민들도 공연 관람의 행복을 당분간 누릴 수 없게 됐습니다.
nar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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