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읽어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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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읽어주는 일

엘르 2026-06-11 10:31:57 신고

한 달 전부터 메일로 원고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온종일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일요일,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이제는 글을 쓸 때가 된 것 같아.’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재 시리즈 제목은 ‘메모로부터’. 그동안 내가 늘 들고 다니던 메모장에, 모닝 페이지용 노트에, 구글 드라이브 이곳저곳에 썼던 조각 글에서 새로운 글을 만들어낸다는 컨셉트다. 일주일에 한 편씩, 구글 드라이브에 원고를 올리고 구독자에게 간단한 인사와 함께 새 원고의 링크를 보낸다.


글쓰기 직전까지 나조차 어떤 글을 쓰게 될지 모르고 구독자 또한 내가 어떤 글을 보낼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글을 기다린다. 약 60명의 사람들이 매주 내 글을 기다리고 읽어준다는 것, 내가 뭘 쓸지도 모르면서 그냥 나를 믿고 원고를 구독해 줬다는 사실이 매일 믿기지 않는다. 이들에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보내고 싶어서, 써야 하니까 쓰는 글 말고 최대한 진실되게 쓴 글을 읽히고 싶어 나는 매주 긴장한다. 원고를 보내기로 약속한 월요일은 글로 다른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다려지는 날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괜찮은 글을 완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소 고통스러운 날이기도 하다.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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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메모로부터’ 연재에서 쓰는 글의 대부분은 엄마와 아빠, 내 어린 시절에 관한 것이다. 2년 전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로 나는 자꾸 과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와 가족이 지나온 시간에 대해, 내가 가족과 맺어온 관계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출퇴근길에 책을 읽다가도 순식간에 이런 생각에 빠져 자주 멍한 상태로 창밖을 봤다.


메모장에는 엄마와 아빠에 대한 이야기, 두서없이 떠오른 어릴 적 기억이 조금씩 쌓여갔다. 한 편의 제대로 된 글도, 책도 될 수 없을 것 같은 단어와 문장이었다. 왜 나는 아빠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이렇게 집착할까? 아빠의 죽음 이후 가족에 관한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엄마와 아빠를 끔찍하게 사랑했나? 왜 자꾸 어린 시절의 일이 떠오를까? 그 경험과 기억이 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서, 그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서, 메모가 쌓이게 내버려뒀다.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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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회고록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남편과 딸이 죽은 이후의 시간을 다룬 조앤 디디온의 〈상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들의 삶을 회상하며 자신의 계급적 뿌리를 더듬어보는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와 〈한 여자〉, 한국전쟁 이후 기지촌에서 일했던 엄마의 이야기를 다룬 그레이스 M. 조의 〈전쟁 같은 맛〉, 사랑과 결혼이 전부라고 믿었던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았던 자신과 엄마의 삶을 나란히 놓고 쓴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그들의 생애를 개인적인 것이 아닌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것으로 포지셔닝한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와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이런 책들이 나에게 무엇이든 얘기해 줄 거라고 믿었다.


책을 읽다 보니 알게 됐다. 나는 아빠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고, 그 죽음이 우리의 계급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고, 그러니 나에 대해 쓰기 위해서는 ‘가난’이라는 글자와 결코 떼 놓을 수 없는 엄마와 아빠, 내 어린 시절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체 누가 이런 얘기를 궁금해할까? 나는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부 들려주고 싶었고, 그것도 정확하게 들려주고 싶었다.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 사람들의 수가 다섯이든 열이든 백이든 상관없다. 내 이야기를 듣겠다고 사람들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이게 내가 원고를 연재하게 된 이유다.


아직 얼마되지 않았지만, 원고를 연재하며 달라진 점이 있다. 하나,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애란 작가는 책 〈질문들〉에서 ‘AI 시대에 문학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어떤 진실은, 고통은, 반드시 그 사람이 말하고 싶어 하는 속도로, 말하고 싶은 분량만큼 전해져야 한다”고 말한 적 있다. 나는 ‘메모로부터’를 연재하면서 누군가 말하고 싶어 하는 속도로, 말하고 싶은 분량만큼 그대로 들어주고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데 안도한다.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들에게 글을 보여주면서 안전함을 느낀다.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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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나 역시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게 됐다. 여기서 ‘다른 이’는 주로 엄마다. 예전보다 말이 많아진 엄마, 말로 과거와 현재를 수십 번은 오가는 엄마, 말하다가 자꾸만 우는 엄마를 잠자코 기다릴 수 있게 됐다. 그건 내가 나를 그렇게 대해주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기 때문이다. 그냥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사람을 혼잣말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게 돼서 가능해진 변화다.


얼마 전 어버이날에는 오랜만에 부산에 내려가 엄마를 만났다. 엄마와 마주앉아 별별 이야기를 다 들었다. 엄마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왜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지, 외할머니는 6·25 때 어떻게 살았는지, 초등학생 시절의 엄마를 선생님들이 얼마나 귀여워했는지, 엄마와 아빠가 결혼할 때 아빠가 엄마에게 어떤 약속을 했는지, 엄마가 최근 다이소에서 얼마나 웃긴 경험을 했는지….


함께 부산을 방문해 준 친구와 끝없이 이어지는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기 직전, 엄마가 친구에게 말했다. “다음 번에 네가 또 부산에 오면 내가 네 얘기를 들을게. 너무 내 얘기만 한 것 같네.” 나는 혼자 웃었다. 원고에 쓸 에피소드가 하나 더 늘어서. 그리고 엄마에게도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 같아서. 아주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엄마에게도 내가 쓴 글들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황효진

세심하고 다정한 시각으로 콘텐츠를 만들고, 때때로 실패하며 배우는 기획자이자 작가. 건강하게 일하는 법을 고민하는 여성 커뮤니티 ‘뉴그라운드’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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