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13년 만에 그룹 핵심 계열사의 등기이사로 돌아온다. 신세계그룹은 지난 8일 정 회장이 이마트와 신세계프라퍼티의 대표이사를 맡는다고 밝히며, 이를 "이사회에 참여하는 법적 등기임원 CEO로서 완전한 책임경영을 실현하겠다는 선언"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룹은 당면 현안을 신속히 해결하고 미래 혁신 성장을 진두지휘하기 위한 결단이라고 설명했다.
8일 발표는 '내정' 단계로, 실제 등기이사 선임 절차는 신세계프라퍼티에서 먼저 시작된다. 회사는 곧 이사회를 열어 정 회장을 등기이사 후보로 추천하고, 주주총회에서 선임안을 통과시킨 뒤 다시 이사회를 열어 각자대표로 임명하는 수순을 밟는다.
반면 이마트는 올해 정기 임원인사에서 각자대표로 내정한 뒤 내년 정기 주주총회 승인을 거쳐 최종 선임할 계획이다. 정 회장은 이미 지난해 신세계그룹과 알리바바인터내셔널의 합작법인 AG글로벌홀딩스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어, 두 계열사 선임 절차가 끝나면 그룹 내 세 곳의 이사회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함께 단행된 전문경영인 인사에서도 사태의 엄중함이 묻어난다. 신세계프라퍼티 각자대표에는 이형천 개발본부장이 내정됐다. 1993년 신세계에 입사해 이마트 개발팀장을 거쳐 2017년부터 신세계프라퍼티에서 개발을 맡아 온 그는 스타필드 청라 등 대형 복합개발을 이끌어 온 개발 전문가다.
2016년부터 회사를 이끌어 온 임영록 사장은 이번 인사로 용퇴한다. 스타벅스코리아(SCK컴퍼니) 신임 대표에는 신동우 신세계프라퍼티 지원본부장이 내정됐다. 그룹 전략실과 이마트·SSG닷컴을 두루 거친 전략·재무통으로, 2023년 스타벅스코리아 전략기획본부장을 지내 내부 사정에 밝다는 평가를 받는다.
손정현 전 대표 해임 21일 만의 후속 인사로, 조직 안정화에 방점을 찍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룹은 정 회장이 중장기 비전과 기업가치 제고를, 전문경영인이 현안과 수익성을 맡는 '시너지 경영'을 구현하겠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발표문의 언어와 시장이 이를 받아들이는 결은 사뭇 다르다. 그룹은 '자발적 결단'을 앞세웠지만, 자본시장에서는 수세에 몰려 꺼낸 카드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이번 결정의 출발점이 2주 전 정 회장 자신의 입에서 나온 한 문장이라는 점에서, 이번 인사는 한 편의 인과로 읽힌다.
"모든 책임은 저에게"…그 말이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
지난달 26일, 정 회장은 서울 강남구 조선팰리스 호텔에서 스타벅스코리아의 '5·18 탱크데이' 마케팅 논란에 대해 직접 고개를 숙였다. 2024년 3월 그룹 회장 취임 이후 처음으로 공개 사과에 나선 그는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겠다. 이번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다"고 말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겠다"는 다짐도 덧붙였다.
문제는 그 '책임'을 받쳐줄 법적 지위가 그에게 없었다는 데 있었다. 정 회장은 사과 당시 이마트의 사내이사가 아니었다. 그룹의 주요 의사결정을 사실상 주도하면서도, 경영 판단에 대한 상법상 책임이나 주주총회의 평가에서는 비켜서 있는 미등기임원 신분이었던 것이다.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다"는 약속과 '책임을 물을 제도적 통로가 없다'는 현실 사이의 괴리는, 사과 직후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이번 등기이사 복귀는 바로 그 간극을 메우려는 조치다. 정 회장은 8일 발표에서 "회사 경영에 대해 명확한 책임을 지라는 시장의 요구를 엄중하게 받아들인다"며 "앞으로 대표이사로서 이사회와 주주의 평가를 받겠다"고 밝혔다. 사과 회견에서 공언한 '행동'의 첫발을, 스스로 책임을 떠안는 방식으로 내디뎠다.
거세진 책임경영 압박…1년 넘게 쌓인 '미등기 총수' 논란
사과 이후 정 회장을 향한 책임경영 요구는 자본시장 전반에서 분출했다. 그 가운데 가장 구체적인 목소리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에서 나왔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표방하며 국내 주주행동주의 진영의 구심점 역할을 해 온 단체다. 포럼은 사과 회견 바로 다음 날인 지난달 27일 논평을 내고,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다"고 밝힌 정 회장이 실질적 책임을 지려면 등기이사에 올라 주주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포럼이 짚은 핵심은 '권한과 책임의 분리'였다. 이마트는 스타벅스코리아 운영사인 SCK컴퍼니의 최대주주이고, 정 회장은 그 이마트의 최대주주다. 그럼에도 그는 사내이사가 아니어서 회사의 주요 의사결정을 사실상 주도하면서도 주주 앞에서 책임을 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권한은 총수가 쥐고 평가의 부담은 비켜 가는 구조를, 포럼은 정면으로 겨눴다.
이런 요구가 이번에 처음 나온 것도 아니다. 포럼은 이미 지난해 초부터 정 회장이 경영 실패와 주가 하락, 차입금 누적에 대한 책임을 지고 등기이사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다시 말해 이번 복귀는 1년 넘게 누적된 거버넌스 압박 위에 스타벅스 사태라는 방아쇠가 더해진 결과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이 정 회장의 등기이사 선임 소식에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문제 제기가 특정 진영의 논리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도 짚어둘 만하다. 그룹 총수가 이사회 밖에서 권한만 행사하던 관행에 대한 문제의식은 최근 자본시장 전반에서 확산해 왔고, 등기이사를 통한 책임경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그만큼 거세졌다. 정 회장의 복귀는 그러한 흐름을 상징하는 사례로 꼽힐 수 있다.
'책임의 시간표'에 드러난 비대칭…프라퍼티는 즉시, 이마트는 내년
다만 '완전한 책임경영'이라는 선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대목이 일정표 안에 숨어 있다. 그룹이 한데 묶어 발표한 두 계열사의 등기이사 선임은 시점이 크게 어긋나 있다.
신세계프라퍼티 대표직은 곧바로 이사회 · 주주총회 절차에 들어간다. 정작 이번 사태의 본체라 할 이마트의 대표이사 선임은 올해 정기 임원인사 내정을 거쳐 내년 정기 주주총회로 미뤄졌다. 스타벅스코리아의 최대주주이자 '탱크데이' 책임의 정점에 놓인 회사는 이마트인데, 그 이마트의 등기 등재가 가장 늦은 것이다. 빠르게 책임의 틀 안으로 들어서는 쪽은 미래 성장사업을 담당하는 신세계프라퍼티이고, 당장 신뢰 회복이 급한 유통 본체는 1년 가까이 뒤로 밀린 모양새다.
물론 이 시차에는 절차적 사정이 깔려 있다. 상장사인 이마트는 사내이사 선임을 주주총회에서 의결해야 하는데, 정기 주총은 통상 3월에 열린다. 올해 정기 주총이 이미 지난 만큼 다음 정식 기회는 내년이다. 비상장 계열사인 신세계프라퍼티는 주주 구성이 단순해 임시 주총을 곧바로 열 수 있다.
하지만 상장사라 해도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하면 즉시 등기이사를 선임할 수 있다. 실제로 거버넌스포럼은 이마트가 임시 주총을 열어 곧장 절차를 밟을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빠른 길을 두고도 정기 주총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은, 절차의 문제라기보다 속도에 관한 선택의 문제다.
지연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정 회장의 사과 이후에도 이마트 주가는 약세를 면치 못했고, 2대주주인 국민연금이 수탁자 책임 원칙에 따라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나서야 한다는 책임론까지 제기됐다. 총수의 결정에서 비롯된 손실은 일반주주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는데, 정작 그 책임을 묻고 평가할 이마트 주주총회 무대에 정 회장이 오르는 것은 1년 뒤다.
이 시차는 또 다른 의문으로 이어진다. 정 회장은 올해 3월 정기 주주총회라는 공식 통로를 이미 한 차례 지나쳤다. 거버넌스포럼이 그 주총을 겨냥해 등기이사 선임을 요구했음에도 카드를 꺼내지 않다가, 스타벅스 사태로 여론이 들끓은 뒤에야 복귀를 결정한 것이다.
재계 일각에서 이번 인사를 자발적 책임경영이라기보다 떠밀린 결정으로 보는 시각이 나오는 까닭이다. '책임'을 내세운 결단의 진정성은, 결국 가장 책임이 무거운 자리에 얼마나 빨리, 얼마나 온전히 들어가느냐로 가늠될 수밖에 없다.
13년 전 떠난 자리, 그리고 진짜 시험대
정 회장이 등기이사 자리를 비운 2013년의 사정도 이번 복귀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고소·고발이 잇따르는 등 오너리스크가 불거진 국면에서 신세계와 이마트의 등기이사직을 내려놓았다.
리스크를 계기로 이사회를 떠났던 그가, 13년 만에 또 다른 리스크를 계기로 이사회로 돌아오는 셈이다. 권한은 줄곧 쥐고 있었으되 책임의 무대에는 오르지 않았던 13년이, 스타벅스 사태를 분기점으로 막을 내리는 구도다.
남은 변수도 적지 않다. 신세계그룹의 자체 진상조사는 담당 직원들의 고의성을 입증할 명확한 근거를 끝내 찾지 못한 채 마무리됐으나, 외부의 사법 시계는 따로 돌아가고 있다. 서민민생대책위원회가 지난달 20일 정 회장과 손정현 전 스타벅스코리아 대표 등을 모욕·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한 데 이어, 5·18기념재단과 공법 3단체도 28일 5·18특별법 위반 등 혐의로 고소장을 냈다.
흩어져 접수된 사건은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공공범죄수사대로 병합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피해 대상의 특정성 등을 들어 혐의 적용이 쉽지 않으리라는 신중론도 나온다.
미국 스타벅스 본사는 지난 7일 5·18기념재단에 별도의 공식 사과문을 전달하며 진화에 나섰다. 그룹이 사과 회견에서 "현재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던 본사의 콜옵션 행사 가능성은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분위기지만, 사태의 매듭이 완전히 지어진 것은 아니다. 5·18 단체를 직접 찾는 광주 방문 사과 역시 단체 측이 법적 대응으로 맞서면서 시점을 점치기 어려운 상태다. 등기이사 등재가 이 모든 현안의 매듭을 자동으로 풀어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분명한 변화는 있다. 앞으로 정 회장의 경영 판단은 이사회 의결과 주주총회 평가라는 공식 절차 안으로 들어온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신뢰를 회복하겠다"던 약속이 빈말이었는지 아닌지는, 이제 등기부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이 아니라 그 이후 주주와 시장 앞에서 받는 성적표로 증명된다. 13년 만에 돌아온 책임의 무대에서, 진짜 시험은 지금부터다.
[폴리뉴스 조자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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