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디스클로저 데이〉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21세기 SF 블록버스터의 정점에 크리스토퍼 놀란이 있다면, 20세기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세상이었습니다. 현재는 연출보다 제작을 더 많이 하는 그가 오랜만에 새 SF 영화 〈디스클로저 데이〉에서 감독으로 나섰습니다. 각본은 스티븐 스필버그와 숱한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데이빗 코엡이 썼지만, 원안 자체는 감독의 것이죠. 그의 우주 영화에 으레 등장하는 '지적인 외계인'이 이번에도 나옵니다.
영화 〈디스클로저 데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미국에는 워덱스(WARDEX)라는 비밀 기구가 있는데, 최고 등급의 보안 기록에 접근할 수 있는 요원 12명이 하루 아침에 사라집니다. 증발한 건 요원 만이 아닙니다. 워덱스가 관리하는 약 79년 간의 기밀도 함께 자취를 감췄죠. 자료는 요원 중 하나인 다니엘 켈너(조쉬 오코너)에게 있습니다. 이 모든 작전을 설계한 건 워덱스를 빠져 나온 12인의 우두머리 휴고(콜먼 도밍고)입니다.
영화 〈디스클로저 데이〉
노아 스캔런(콜린 퍼스)이 이끄는 워덱스는 켈너의 연인 제인(이브 휴슨)을 인질로 잡아 기밀 자료를 되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켈너는 '기기'라 불리는 미상의 물체로 요원들을 협박하다가 도주하는 데 성공해요. 그가 훔친 자료는 미국 국방부와 방산 업체들이 결탁해 외계인으로 생체 실험을 하거나 비행체를 탈취하는 모습을 찍은 영상들이었는데요. 켈너는 이를 제인에게 보여주며 영상을 전 세계에 폭로하겠다는 계획을 털어놓습니다.
한편 주말 뉴스 앵커를 꿈꾸는 기상 캐스터 마가렛 페어차일드(에밀리 블런트)는 갑자기 이상한 경험을 합니다. 타인의 눈을 보기만 하면 마치 그 사람이 된 것처럼 모든 정보를 알게 되는 건데요.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온 홍관조와 눈을 맞춘 후부터 마주치는 사람마다 방언 터지듯 조언들이 튀어나옵니다. 갑자기 러시아어를 했다가, 한국어를 하기도 하고요. 스스로는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지만요. 같은 날 마가렛은 생방송 도중에 지구 상 어느 나라의 언어도 아닌 이상한 음성을 내뱉고는 쓰러집니다. 마가렛의 방송 사고 영상이 SNS에 퍼진 후, 워덱스가 그를 쫓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추적을 피해야 한다는 일종의 계시를 받은 듯한 마가렛은 무작정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마가렛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켈너의 존재를 느끼고, 켈너는 단 한 명도 이해하지 못한 마가렛의 방송 사고 당시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휴고는 두 사람이 무언가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획을 꾸민 듯하지만 절대 내막을 알려 주지는 않아요. 그 사이 세상은 제3차 세계 대전 임박으로 아비규환이 됐습니다. 하지만 켈너의 연인 제인은 외계인 영상이 폭로됐을 때 전쟁보다 더 큰 혼란이 찾아올 것을 걱정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자, 신을 섬기던 사람들이 외계인을 모실 거라면서요. 휴고와 켈너를 비롯한 12요원들은 80억 인구의 '알 권리'를 주장합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 수준의 기밀을 소수의 이익 집단이 독점해서는 안된다는 거죠. 켈너와 마가렛이 직접 만나 어떤 사연을 공유하고 있는지 밝혀지기 전까지, 폭로를 막으려는 측과 하려는 측의 추격전은 계속됩니다.
영화 〈디스클로저 데이〉
영화는 여러 성경적 상징을 통해 인간 외 지적 생명체의 출현을 신의 강림처럼 묘사합니다. 워덱스에서 기밀을 탈취한 요원 열두 명이 12사도와 겹쳐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세 개가 세트인 '기기'를 통해 존재하지 아니한 곳에 거할 수 있다는 설정이나 십자가로 손바닥을 찔러 세뇌에서 벗어나려는 인물을 봐도 그렇습니다. 켈너와 마가렛은 신의 두 촛대, 혹은 사탄의 두 짐승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이 같은 성경의 기호학적 활용도 매우 낡은 것으로 다가오지만, 〈디스클로저 데이〉가 '실재하는 절대자'로 규정한 외계인이 절대자의 위치를 확보하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단순히 타인이 된 것처럼 공감하는 능력 하나 때문에 79년 동안 인간에게 착취와 학대를 당할 만큼 물리적으로 약한 외계인을 신으로 모신다는 건 난센스죠. 영화 속 외계인이 인간보다 지적으로 월등하고 공감 능력도 풍부하다고 가정한들 막상 보여준 게 없습니다. 예수처럼 부활은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기적은 있어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전 세계 포춘텔러들은 전부 신이 돼야 할 겁니다.
영화 〈디스클로저 데이〉
그래서 외계인 영상 폭로를 사명으로 여기는 휴고 무리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인간이 약한 외계인을 100년 가까이 일방적으로 학대하고 착취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건지, 그저 지적 외계인이 실존한다는 걸 전하려는 건지 헷갈립니다. 또 그들의 폭로 내용이 '80억 인구가 당연히 알아야 하지만 모르는 것'이라서 모두의 '알 권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엔 근거가 약합니다. 세계 대전이 벌어졌는데 인류에 위협이 되지 않는 외계인이 전쟁 뉴스보다 더 놀랍고 어마어마한 정보가 되진 못합니다. 오히려 '몰라도 되는 것'에 가까울 거예요. 진화론 대신 창조론을 믿는 사람이라면 〈디스클로저 데이〉 세계관에서 '절대자'인 외계인이 혼란스러운 존재일 테지만, 반대의 경우엔 세상의 질서가 흔들린다며 우려하거나 '우주를 독점하는 세력이 있다'며 들고 일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현재 실제로 패권 국가들의 전쟁 탓에 온 세계가 영향을 받고 있는 마당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지구 멸망을 예언했다는 1999년 즈음 나온 이야기라면 대단하게 여겨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의 메시지 뿐만 아니라 CGI를 포함한 비주얼과 자잘한 설정들도 오래된 느낌입니다. 12요원들이 정 외계인의 존재를 폭로하고 싶었다면 보안 등급 높은 요원이 기밀을 빼내서 SNS에 올리면 그만인 세상입니다. 나름의 절차적 필요성이 있더라도, 128GB 짜리 USB 수십 개를 들고 다니며 목숨 걸고 방송국을 찾을 일은 아니죠. 전체적 분위기가 비장하고 종교적인 것에 비해 외계인의 모습은 〈E.T.〉나 〈미지와의 조우〉 시절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도 아쉽습니다.
영화 〈디스클로저 데이〉
〈디스클로저 데이〉에도 독창성이 돋보이는 대목은 있습니다. 외계인이 진화 우위 확보를 위한 노력으로 공감 능력을 발달시켰다는 설정이 서사에 종교적인 형태로 녹아 있는 부분은 인상 깊었어요. '접촉자'와 '침투'라는 개념을 통해 외계인으로부터 내림(?) 받지 않은 자들의 마음을 원격 조종할 수 있다는 설정도 참신했고요. 다만 이처럼 창의성을 일부 확보한 세계관을 설득하려는 노력은 거의 없습니다. 외계인의 계시를 받은 켈너와 마가렛의 막무가내를 설명 없이 따라가기엔 145분의 러닝타임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10일 개봉.
Copyright ⓒ 엘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