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의 문학관 편지] ‘윤동주의 오래된 노트’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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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의 문학관 편지] ‘윤동주의 오래된 노트’ 앞에서

경기일보 2026-06-09 19:16:3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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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노작홍사용문학관장

 

나무 인문학자 고규홍 선생이 따지듯 물었다. 잡지 발표작이 더 좋은데 왜 시집에선 퇴고를 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예민한 시안을 가진 분이라 곤혹스럽다. 모국어의 정수라는 시에서마저 교정 교열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뭔가 시인에 대한 불신이 깔린 것 같기도 해 속이 뜨끔하기도 하다.

 

“나의 첫 애송시는 미당 서정주의 ‘귀촉도’였어요. 교과서에서 읽고 인상 깊어 여러 번 읽다 보니 저절로 외우게 됐지요. 나중에 보니 서정주 시인의 모든 시집에서 내가 외우고 있던 ‘이승에선 못 뵈올 님이시라면’이란 구절이 빠져 있더군요. 파리 특파원 시절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집에서 세계 여행 중이던 미당을 만났어요. 사라진 구절의 내력을 물었더니 ‘유행가 가사 같아서 뺐다’는 겁니다. 어릴 때 외운 것만 그렇게 오래 남더군요”

 

원로 언론인 김성우와 정재숙의 대담으로 읽는 ‘우리나라 시낭송 운동 50년’(대산문화 66호)에 실린 이 이야기는 부족방언의 마술사로 불리는 미당 또한 엄격한 잣대로 교과서에 실린 완성작마저 미완으로 돌려 퇴고했음을 알게 한다. 또한 소리의 질서를 중시하는 낭송가로선 시인과 다른 미의식을 포기할 수 없어 ‘외운 것만 그렇게 오래 남더라’는 씁쓸한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미당으로선 제작의 비밀이 들통났으니 꽤 난감했을 것 같기도 하다.

 

최근 화성문화원의 문화대학 시 창작과정 강의를 하다 수강생들의 창작 열기를 북돋울 겸 해서 찾아본 신춘문예 역대 당선 작품집 심사평에서 기형도를 만났다. 시인의 ‘겨울 판화(版畵)’는 신춘문예 낙선작이었다. 1983년 심사평은 이렇다. ‘일단 주목할 만한 표현의 균형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 표현이 충분히 개성적이고 뚜렷한 윤곽을 얻고 있지 않다는 인상’이라는 것이다. 1985년의 심사평에선 대표작 ‘안개’에 대한 ‘미숙과 앳된 구석’을 신랄하게 지적한다. 시집에 실린 ‘겨울 판화’ 중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는 투고 당시엔 “참아라. 네가 크면 이 겨울이 바로 너를 감싸줄 옷이라는 걸 알게 된다”였음을 역시 심사평을 통해 알 수 있다. 겨울이 옷이라는 언뜻 멋스러워 보이는 표현이 장식을 버리면서 더 큰 울림을 얻게 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강렬한 독창성은 대체로 이 같은 지리멸렬한 습작의 과정을 치열하게 통과함으로써 얻어진다. 에드거 앨런 포는 그래서 문학의 99%를 이루는 빨간 잉크로 고친 자국과 시커멓게 지운 자국을 훔쳐보게 한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글쓰기의 광기나 영감의 황홀경 같은 낭만적 신화를 깨기 위해 자신의 창작 과정을 낱낱이 공개하기도 했다. 마땅한 창작 경로를 찾지 못해 독학을 해야 했던 습작 시절, 이런 퇴고의 흔적들을 추적하는 일은 그 어떤 시작법도 가르쳐줄 수 없는 자기 안의 스승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때 수집한 시들 중 전집에도 실리지 않은 시를 신경림 시인에게 드렸다가 치부를 들추고 다니는 파파라치 취급을 받고 혼이 난 일이 있다. 그 시들은 시인이 애써 감추고 싶었던 시였던 것이다. 어느 지방지의 소설 공모에 가작으로 당선된 선생의 장편소설을 발굴할 야심찬 계획을 나는 그때 접고 말았다.

 

시인은 원치 않을지 모르겠으나 이미 공공재로 제시된 작품의 다양한 접근은 읽는 이의 고유한 권한이다. 김신정 교수의 ‘윤동주의 오래된 노트’를 보니 새삼 그런 확신이 든다. 제도 안에서 시인으로 불린 적 없고 시 한 편 발표한 적 없으나 한국시의 심장이 된 윤동주의 창작 과정을 살핀 이 연구서는 연서와 성장담과 문학이론 그리고 여행과 논픽션을 총망라하는 역작이다. 습작 노트와 육필 원고에 남은 메모 등을 통해 우리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원제가 ‘병원’이었다는 사실로부터 또 다른 감상의 지평을 누리게 된다. 창씨개명 직전에 쓴 ‘참회록’의 원고 하단에는 복잡한 심경을 엿보게 하는 낙서들이 있는데 무엇이 표현되고 표현되다 말았는지, 혹은 표현되지 못했는지 글쓰기의 잠재된 가능성까지를 엿보게 된다. 100부 한정판으로 나온 백석의 ‘사슴’을 구할 수 없어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필사해 보관한 노트 앞에선 시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듯하다.

 

‘윤동주의 오래된 노트’를 보니 신경림 시인의 장편소설을 다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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