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저널코리아 김영일 기자 | 서울문화재단 2026 예술창작활동지원 선정 프로젝트인 연극 <호기우타(寿歌)>가 오는 7월 4일부터 12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관객을 만난다.
이번 공연은 2025년 제12회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 프로그램을 통해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여 호평을 받은 작품의 본공연으로, 래빗홀씨어터가 제작한다.
일본 현대희곡의 거장 기타무라 소가 1972년에 집필한 <호기우타>는 핵전쟁 이후의 폐허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부조리 희극이다. 유랑극단 출신의 게사쿠와 교코, 그리고 원본만 있으면 무엇이든 복제해 내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 야스오가 리어카를 끌고 정처 없이 떠돌며 보이지 않는 관객을 향해 공연을 이어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초연 이후 수많은 무대에서 상연되며 일본 현대연극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한 작품이다.
반세기 전 희곡이 오늘의 현실을 비추다. 50여 년 전 쓰인 희곡인 <호기우타>가 오늘날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작품이 다루는 세계가 더 이상 허구적 상상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이 탄생한 1970년대, 핵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세계는 냉전 시대의 불안이 그려낸 상상이자 먼 미래를 향한 경고처럼 읽혔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그 풍경은 더 이상 허구의 세계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지속되는 국제 분쟁과 핵무기 위협, 심화되는 기후위기와 생태계 붕괴는 작품 속 세계를 현재의 문제로 끌어당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숨 막히는 폭염 속을 걷다가 어느 순간 눈보라와 빙하기를 맞닥뜨린다. 더 이상 생명이 자라나지 않는 황폐한 풍경은 인류세(Anthropocene)의 종말을 연상시키며 현재의 세계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호기우타>는 기후위기와 핵전쟁이라는 동시대적 과제를 예언적으로 조명하며 재난 이후의 상상을 넘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직면한 현실에 대한 성찰을 요청한다.
‘밝은 허무’가 건네는 질문-무력함을 견디게 만드는 힘으로서의 예술
그러나 <호기우타>는 단순한 재난 서사나 종말의 비극에 머물지 않는다. 게사쿠와 교코는 끊임없이 농담을 주고받고, 야스오는 어설프지만 순수한 모습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관객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이들은 공연을 이어간다. 보이지 않는 객석을 향해 만석이라고 외치고, 들을 수 없는 음악을 상상하며,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공연을 이어간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독특한 정서는 흔히 ‘밝은 허무’라 불린다. 세계는 무너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사랑하고, 노래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관객에게 묻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희망이 사라진 뒤에도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작품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음으로써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깊이 응시하게 만든다.
<호기우타>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세 인물이 폐허가 된 세상 속에서도 공연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산성과 효율성만을 추구하던 세계가 파국에 이른 뒤에도 이들은 공연을 계속한다. 아무도 보지 않을 수 있는 무대에서 이어지는 공연은 전쟁과 재난으로 사라진 존재들을 향한 애도이자,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작품 속 극중극은 연극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순간에도 공연은 왜 계속되어야 하는가. <호기우타>는 예술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무효함과 무력함을 견디게 하는 힘, 절망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게 하는 힘이 예술에 있음을 보여준다.
윤혜숙 연출, 동시대의 위기를 예술의 언어로 질문하다
이번 공연의 연출은 래빗홀씨어터의 윤혜숙이 맡았다. 윤혜숙은 2020년 제11회 두산연강예술상 공연부문 수상자로 선정되며 주목받은 바 있다.
<은의 혀>, <정희정>, <마른대지>, <우리는 이 도시에 함께 도착했다>, <세컨드 찬스>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인간과 사회, 공동체의 균열을 섬세하게 탐구해온 연출가다. 텍스트가 지닌 문학성과 배우의 존재감을 밀도 있게 결합하는 작업으로 호평받아 왔으며,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무대 위에서 설득력 있게 구현해왔다.
이번 <호기우타>에서 윤혜숙은 원작이 던지는 핵전쟁과 기후위기의 문제를 오늘의 현실과 연결하며, 인간과 예술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윤혜숙 연출은 “<호기우타>가 다루는 기후위기와 핵전쟁은 더 이상 먼 나라나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라며 “이 작품이 동시대의 위기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대화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종말의 상황에서도 공연을 멈추지 않는 인물들을 통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과 예술의 의미를 다시 질문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명동예술극장 낭독공연의 배우들이 다시 만나다
게사쿠 역에는 배우 이경민, 교코 역에는 배우 정다연, 야스오 역에는 배우 우범진이 출연한다.
세 배우는 2025년 낭독공연 <호기우타>에도 참여하며 작품과 첫 만남을 가졌다. 낭독공연을 통해 작품의 언어와 인물들을 깊이 탐구했던 배우들이 이번 본공연에도 그대로 합류하면서 작품에 대한 이해와 인물 간의 호흡을 한층 깊게 다져냈다.
이경민, 정다연, 우범진은 폐허가 된 세계를 떠도는 마지막 생존자들의 여정을 통해 불안과 유머,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호기우타>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현할 예정이다. 특히 세 인물이 만들어내는 만담과 공연 장면들은 작품 특유의 부조리한 유머와 애잔한 정서를 동시에 전달하며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길 것으로 기대된다.
연극 <호기우타>는 오는 7월 4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전 회차 한글자막해설이 제공되며, 예매는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과 NOL 티켓을 통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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