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은 96년 역사상 최대 규모로 열린다. 미국·캐나다·멕시코가 공동 개최하고, 출전국은 48개국으로 늘었다. 경기 수는 총 104경기다. 오는 12일(이하 한국시간) 개막해 내달 20일 결승까지 한 달이 넘게 이어진다. 규모만 놓고 보면 월드컵은 여전히 세계 최대 스포츠 이벤트다.
그런데 국내 체감 온도는 예전만큼 뜨겁지 않다. 대한축구협회(KFA)를 둘러싼 잡음, 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에서 불거진 논란, 경기력을 향한 불안감은 분명 열기를 낮추는 요인이다. 그렇지만 전부 축구 행정 문제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여러 요인 중 눈에 띄는 가장 큰 변화는 대중문화 시장에서 월드컵이 차지하던 독점적 지위가 약해졌다는 점이다. 한때 월드컵은 방송 편성표를 멈춰 세우는 행사였다. 국가대표 경기가 있는 날이면 드라마와 예능은 자리를 내줬다. 지상파 동시 중계는 거실의 선택권을 사실상 지웠다. 거리 응원과 단체 관람은 하나의 사회적 의식처럼 작동했다. 월드컵은 스포츠 대회를 지나 온 국민이 같은 화면을 보는 문화 일정이었다.
◇월드컵 불패 신화… 방송가에서 먼저 깨졌다
과거 방송가에서 월드컵 기간 결방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국가대표 경기는 시청률과 화제성을 모두 빨아들이는 초대형 이벤트였다. 예능, 드라마 등 여타 프로그램과 충돌을 피했다. 광고 시장과 편성 전략도 축구 일정에 맞춰 움직였다. 지금은 사뭇 다르다. 넷플릭스, 티빙, 웨이브, 쿠팡플레이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는 특정 시간대에 묶이지 않는다. 드라마와 예능, 연애 리얼리티, 아이돌 콘텐츠, 웹예능은 각자 팬덤을 붙들고 움직인다. 축구 중계가 실시간 이벤트라면 OTT 오리지널은 언제든 재생 가능한 저장형 경쟁자다. 시청자는 경기 시간이 불편하면 다른 콘텐츠를 고르고, 결과만 궁금하면 하이라이트를 본다.
중계권 협상 과정도 이전과는 달라진 분위기를 형성했다. 북중미 월드컵 중계권을 가진 JTBC는 KBS와 공동 중계를 확정했지만, MBC·SBS와의 재판매 협상은 결렬됐다. 여러 보도에 따르면 KBS와 JTBC는 140억 원에 합의한 반면, MBC와 SBS는 120억 원 이상을 부담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과거 월드컵 중계가 방송사의 당연한 선택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비용 대비 효과를 따져야 하는 콘텐츠 투자 상품이 된 셈이다. SBS와 MBC의 협상 불발은 월드컵의 몰락을 뜻하지 않는다. 하지만 방송사가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반드시 붙잡아야 했던 ‘절대 콘텐츠’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음을 상징적 의미였다. 스포츠 중계도 광고 수익, 플랫폼 전략, 제작비, 시청층 변화에 따라 계산되는 시장 상품이 됐다는 의미다. 월드컵의 문화적 위상 변화는 편성표뿐 아니라 중계권, 방송사 입자에서도 드러났다.
◇90분 축구 앞에 선 15초 숏폼 세대
월드컵의 경쟁자는 타 스포츠 종목에 한정되지 않는다.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 웹예능, 서바이벌 프로그램, 아이돌 라이브, 게임 스트리밍까지 모두 같은 시간을 노린다. 과거에는 월드컵이 저녁 시간을 통째로 가져갔다. 지금은 알고리즘이 몇 초마다 다른 자극을 던진다. 축구는 긴 호흡을 요구한다. 90분 동안 골이 나오지 않을 수 있고, 전술 싸움은 천천히 진행된다. 침묵, 압박, 실패한 패스, 무득점 시간이 경기의 일부다. 축구 팬에게는 과정이 묘미지만, 짧고 강한 보상에 익숙한 이용자에게는 진입 장벽이 될 수 있다. 요약본, 골 장면, 선수 인터뷰, 밈 영상만 봐도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이 생겼기 때문이다.
방송통신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OTT 이용은 이미 일상화됐다. 스마트폰은 핵심 시청 기기로 자리 잡았다. 숏폼 선호도 높아져 콘텐츠 소비의 속도와 단위가 달라졌다. 월드컵은 이제 거실 TV 앞 공동 시청 문화가 아니라는 뜻이다. 모바일 기반 개인 선택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도파민 과포화 시대의 대중은 기다림에 인색하다. 10분 안에 반전과 감정선을 제공하는 예능 클립, 한 회 안에 갈등을 압축한 OTT 시리즈, 몇 초 안에 웃음을 주는 숏폼이 늘 곁에 있다. 월드컵이 세계 최대 스포츠 이벤트라는 이름만으로 시간을 독점하기 어려워진 이유다. 이제는 축구도 경기 자체의 과정 결과가 아니고, 서사와 접근성으로 경쟁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애국주의 흥행 공식 이후… 개인 취향의 시대
과거 월드컵 흥행에는 집단 정서가 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는 사회적 참여의 형식으로 소비됐다. 길거리 응원은 대통합의 상징이 됐고, 국가대표 경기는 개인 취향을 잠시 뒤로 미루게 하는 힘을 가졌다. 월드컵을 보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예외처럼 여겨지던 시간도 있었다. 지금의 소비자는 세분화됐다. 누군가는 축구를 보고, 다른 누군가는 드라마를 본다. 게임 방송, 아이돌 라이브, 웹툰, 숏폼, 팟캐스트를 고른다. 같은 시간대에 같은 감정을 공유해야 한다는 압력도 약해졌다. 스포츠 이벤트가 국민적 의무처럼 작동하던 시대는 멀어졌다.
애국주의 마케팅도 예전만큼 절대적이지 않다. 국가대표라는 이름은 여전히 강한 상징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대중의 시간을 자동 확보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선수 개인의 매력, 팀의 성장 서사, 감독과 전술의 이야기, 라이벌 구도, 팬이 재가공할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하다. 다층적인 플랫폼 시장에서 선택받아야 하는 콘텐츠가 됐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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