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공자 김태진 선생이 8일 3·8민주의거기념관 1층 기부자 명패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이현제 기자)
66년 전 교실에서 몰래 구호문을 주고받으며 민주주의를 외쳤던 한 학생의 이름이 뒤늦게 역사 앞으로 불려졌다.
1960년 3·8민주의거에 참여하고 최근에서야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김태진 선생(84·대전고 40회)이다. 김태진 선생은 올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뒤 8일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에 1000만 원을 기탁하며, 자신이 참여했던 3·8민주의거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는 작은 보탬이 되겠다는 뜻을 전했다.
김 선생은 1960년 당시 대전고 2학년이었다. 점심시간 뒤 시위가 있다는 말이 반 대표들에게 전달됐고, 수업 중 몰래 구호문이 손에서 손으로 이어졌다. 같은 반 친구이자 앞서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홍석곤 선생으로부터 "2학년 학생들을 책임져 달라"는 말을 들은 그는 각 반에 시위 참여를 전달했다.
이후 2학년 1반을 시작으로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며 교문 밖으로 나섰고, 대흥동 사거리 방면으로 행진했다. 당시 학생들이 외친 구호는 지금도 김 선생의 기억에 남아 있다. "학원사찰 웬 말이냐", "경찰들아 물러가라", "서울신문 강제 구독을 거부한다"는 외침이었다.
거리로 나선 김 선생은 시위 중간 경찰에 붙잡혀 경찰서로 끌려갔다. 취조 과정에서 구타를 당했고, 몸에 지니고 있던 구호문은 증거가 될까 두려워 삼켜야 했다. 그는 밤 1시께 가까스로 풀려났다고 했다.
그러나 그날의 기억이 국가의 공식 기록으로 인정되기까지는 66년이 걸렸다. 과거에도 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당시 참여 사실을 뒷받침할 객관 자료가 부족했다. 1960년 3월 9일자 한국일보 석간 기사에 그의 이름이 '김태진'이 아닌 '김태식'으로 표기된 점도 걸림돌이었다.
김 선생은 올해에서야 해당 기사 속 인물이 자신이라는 점을 입증해 3·8민주의거 참여 공적으로 4·19혁명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당시 대전고 시위 참여 학생 가운데 기사에 나온 '김태…'로 시작하는 학생이 자신뿐이었다는 점 등이 근거가 됐다.
김 선생의 이름과 사진, 인적사항은 앞으로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2층 기념관에 12번째 유공자로 걸릴 예정이다. 현재 기념관에는 3·8민주의거 국가유공자 11명의 이름과 명패, 사진 등이 걸려 있다.
대전 중구 선화동 3·8민주의거기념관 2층에 전시된 3·8민주의거(4·19 공로자) 국가유공자 명패.
이번 기탁은 단순한 기부를 넘어선다. 66년 만에 되찾은 이름을 다시 3·8민주의거의 역사에 돌려놓는 일이자, 아직 이름을 찾지 못한 참여자들을 향한 늦은 인사에 가깝다.
김태진 선생은 과거 자신의 조부가 받은 훈장과 최근 국가유공자 표창증을 함께 집에 전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진=본인 제공)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참여자들을 지역 차원에서라도 예우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명확한 신문 보도 등 객관 자료가 있어야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 현실 속에서, 당시 시위에 참여하고도 기록 부족으로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 이들에게 작은 표식이라도 남기겠다는 취지다.
김태진 선생은 "신문기사와 같이 명백한 기록이 남아 있어야만 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은 아쉽다"며 "당시 거리로 나섰던 학생들이 더 있었고, 그 친구들도 잊히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현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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