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전시현 기자 | 비트코인이 안전자산과 성장자산 어느 쪽으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일(현지 시각) 글로벌 가상자산 거래소 비트겟의 그레이시 첸 최고경영자(CEO)는 자신의 소셜미디어(X)를 통해 "비트코인은 최고의 안전자산도, 최고의 성장자산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갇혀 있다"고 진단했다. 첸 CEO는 최근 시장이 직면한 진짜 딜레마는 비트코인의 모호한 자산 성격에 있다는 지적이다.
▲ '디지털 금'도 성장주도 아닌 비트코인
실제 시장의 자금 흐름은 첸 CEO의 분석을 뒷받침한다. 뉴욕증시에서 S&P500과 나스닥 지수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동안 비트코인은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비트코인은 위험 회피 심리가 커지는 국면에서도 금처럼 피난처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유동성이 풀리는 장세에서도 성장주만큼 자금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위기에는 '디지털 금', 완화 국면에는 고성장 자산으로 통하던 두 갈래 평가가 한꺼번에 흔들린 셈이다.
이런 평가는 가격 지표로도 뒷받침된다. 안전자산이라는 설명은 방어력 부족으로 설득력을 잃었고, 성장자산이라는 기대 역시 자금이 AI로 옮겨가면서 뒤로 밀렸다. 가격을 떠받치던 기술적 지지선마저 차례로 무너지는 모습이다. 첸 CEO는 "다음 지지선은 50개월 단순이동평균(SMA)인 5만9000달러이며, 이마저 무너질 경우 5만2000~4만8000달러 대까지 밀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글로벌 통화 가치 하락이라는 거시적 추세가 유효한 만큼, 장기적인 우상향 관점은 유지했다.
▲ 전쟁에서 세일러로 옮겨간 화살
비트코인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시장 하락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대상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온체인 분석업체 샌티먼트에 따르면, 3월부터 4월 초까지는 이란·이스라엘 등 지정학 변수가 가격이 출렁일 때마다 도마에 올랐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전쟁 관련 언급은 눈에 띄게 줄었다. 대신 5월 31일을 전후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화살은 마이클 세일러와 그가 이끄는 스트래티지로 향했다.
비트코인을 대규모로 사들여온 스트래티지가 흔들리면 시장 전체가 출렁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에 투자자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스트래티지의 시장 영향력과 레버리지 구조, 비트코인 매도 가능성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우려는 실제 움직임으로 뒷받침됐다. 스트래티지는 5월 26일부터 31일까지 비트코인 32개를 약 250만달러에 처분했다. 보유량에 견주면 미미한 규모였지만, 시장이 받아들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비트코인을 핵심 자산으로 편입한 이후 매도 사실을 공개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시장은 이를 '절대 매도하지 않는다'던 원칙에 균열이 생긴 신호로 받아들였다.
▲ 씨티가 짚은 진짜 위기, 신규 자금 실종
이런 시장의 불안과 달리, 월가는 사태의 본질을 다른 각도에서 진단했다. 씨티은행은 스트래티지의 매도가 투자 심리를 흔들었을 수는 있어도 위기의 본질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미 예고된 절세·포트폴리오 조정 차원의 거래였다는 이유에서다. 정작 문제는 신규 매수 주체의 부재라는 게 씨티의 판단이다. 시장을 위로 끌어올릴 새 자금이 들어오지 않으니 가격이 짓눌릴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미국 클래리티법(CLARITY)의 연내 통과 기대가 약해지면서 시장을 떠받칠 명분이 한층 옅어졌다. 씨티는 이를 근거로 극적인 규제 반전이 없는 한 비트코인이 당분간 횡보·조정 흐름을 이어갈 공산이 크다고 내다봤다.
▲ "지금이 바닥"… 반등론도 살아 있다
비관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매도와 자금 이탈을 다르게 해석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세일러는 AI로 향한 자금 이동을 단순한 자본 순환으로 규정하며 비트코인 가치 훼손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6개월간 AI 투자로 약 4000억달러가 몰린 반면 비트코인 ETF에서는 5월 14일 이후 약 40억달러가 빠졌다고 짚으면서도, 변동성이 오히려 기회를 만든다는 논리를 폈다.
ETF 자금 이탈을 보는 시선도 엇갈린다. 블룸버그 ETF 애널리스트 에릭 발추나스는 최근의 자금 유출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진단했다. 최근 한 달간 약 44억달러가 빠져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셰어즈 비트코인 트러스트(IBIT)의 출시 이후 누적 순유입은 여전히 550억달러에 달한다는 것이다. 단기 유출 규모보다 그동안 쌓인 자금이 훨씬 크다는 의미다. 그는 안전자산의 대명사인 금 ETF 'GLD'조차 출시 몇 년 뒤 자산의 40%가 빠져나간 전례가 있다며, 그에 비하면 비트코인 ETF의 투자자 이탈은 오히려 적은 편이고 보유층도 한층 견고하다고 평가했다.
스탠다드차타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지금이 하락의 막바지 국면이라고 진단했다. 가장 거센 매도세는 이미 지나갔다는 것이다. 근거로는 두 가지를 들었다. ETF를 통해 비트코인을 사들인 투자자들이 쉽게 팔지 않고 물량을 단단히 쥐고 있다는 점, 그리고 최근 일부 물량을 처분한 스트래티지가 조만간 다시 대규모 매입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디지털자산 리서치 총괄 제프리 켄드릭은 올해 말 비트코인이 10만달러, 이더리움이 4000달러까지 회복할 것이라는 기존 전망을 그대로 유지했다.
▲ "안전이냐 성장이냐", 낡은 질문 그만
국내 업계에서도 비트코인을 기존 금융자산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양휘강 한국디지털금융문화원(KDFCI) 원장은 "비트코인을 안전자산이냐 성장자산이냐로 나누는 것 자체가 전통 금융의 사고방식"이라며 "비트코인은 주식이나 금을 대체하는 자산이 아니라,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성격의 디지털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최근의 급락도 비트코인의 가치가 무너진 신호가 아니라, 지나가는 조정에 불과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양휘강 원장은 이번 하락을 "ETF 자금 유출과 거시경제 불확실성이 겹치며 나타난 일시적 조정"으로 규정했다. 그는 "비트코인은 지난 15년간 50% 넘는 폭락을 여러 차례 겪고도 그때마다 다시 일어섰고, 그사이 네트워크 규모와 기관 투자자 참여, 제도권 편입은 오히려 꾸준히 늘어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터넷이 정보가 오가는 방식을 바꿨다면, 비트코인은 돈, 즉 가치가 오가는 방식을 바꾸고 있다. 지금의 가격 등락에 일희일비하기보다, 비트코인이 앞으로 디지털 금융의 기반 시설로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에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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