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전시현 기자 | 스테이블코인이 인터넷 기반 경제의 새로운 정산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 잇따랐다. 5일 서울 여의도 FKI타워에서 열린 블록체인 콘퍼런스 '비트코인서울 2026(Bitcoin Seoul 2026)'에서다. 이날 발표자들은 스테이블코인이 단순 거래 수단을 넘어 제도권 금융의 결제·정산 레이어로 편입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이 비기축통화국을 위한 새로운 디지털 금융 표준을 선점할 기회를 쥐고 있다는 분석도 뒤따랐다.
▲ AI 강국에서 금융 표준국으로
이런 흐름의 출발점으로 김호진 해시드오픈파이낸스 대표는 AI 혁명을 지목했다. 첫 발표에 나선 김 대표는 'AI 강국에서 금융 표준국으로-글로벌 G3 시대, 에이전트가 만드는 새로운 금융, 스테이블코인이 여는 한국의 시간'을 주제로 무대에 올랐다. 그는 AI 혁명을 정보·연결에 뒤이은 '지능의 대중화'로 규정했다. 과거 기술 혁명에서 인간이 도구를 쓰는 주체였다면, 이제는 AI 에이전트가 거래의 주체로 올라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가 금융에 닿는 순간 문제가 드러난다. 김 대표는 AI 에이전트가 결제까지 스스로 완결하려 해도, 명령과 실행 사이의 시간 격차와 권한 위임의 불확실성이라는 벽에 부딪힌다고 지적했다. 새벽에 조건에 맞는 항공권이 나와도 에이전트가 결제 권한이 없어 거래를 매듭짓지 못하는 식이다. 그는 이 공백을 메울 해법으로 블록체인을 지목했다. "블록체인의 프로그래머빌리티를 통해 명령에 정확히 맞는 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며 스테이블코인을 'AI 에이전트의 기축통화'로 제시했다.
해법이 분명한 만큼 김 대표는 한국이 쥔 기회도 함께 짚었다. 그는 한국의 강점으로 △
세계 2위 규모의 챗GPT 유료 사용자 기반 △ 칩부터 애플리케이션까지 갖춘 AI 생태계 △ 비기축통화국의 규제 참조국 지위를 꼽았다. 그러면서 비기축통화 표준 확보, 오픈소스 개방형 거버넌스, 세계 최초 유스케이스 선점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제안했다.
▲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시스템의 확장 레이어"
이러한 가능성은 이미 시장 규모로 뒷받침되고 있다. 뒤이어 무대에 오른 강유빈 논스클래식 대표는 '제도권 금융으로 확장하는 스테이블코인'을 주제로 시장의 현주소를 숫자로 풀어냈다. 강 대표에 따르면 전체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발행 기준 약 3230억달러에 이른다. USDT가 약 1800억달러로 59%, USDC가 약 700억달러로 24%가량을 차지한다. 연간 거래량은 112조달러로, 비자와 마스터카드의 결제 규모를 웃도는 수준이다.
이런 규모를 근거로 강 대표는 스테이블코인을 '달러 시스템의 확장 레이어'로 규정했다. 발행 잔액의 99%가 달러에 1대1로 연동된 만큼, 스테이블코인 사용이 늘수록 결제망에서 달러의 지배력도 함께 커진다는 논리다. 그는 2025년 7월 발효된 미국 지니어스법(GENIUS Act)을 그 배경으로 들었다. 이 법이 100% 준비자산 요건과 매월 준비금 공시를 의무화하면서, 스테이블코인 발행이 곧 미국 국채 수요로 이어지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설명이다.
달러를 축으로 한 시장에서 한국의 자리는 어디인가. 강 대표는 결제 인프라와 상위권 금융기관, 콘텐츠 시장은 갖췄으나 '인터넷 네이티브 결제망'이 비어 있다고 짚었다. 그는 이 공백을 메울 사례로 하나금융 주도 6개 은행 컨소시엄의 원화 스테이블코인과 비댁스의 KRW1 발행을 제시했다.
▲ "선급금 없는 송금이 진짜 혁신"
원화 결제망 논의는 곧 해외 송금이라는 현실의 과제로 이어졌다. 박지수 수호아이오 대표는 외환 인프라 'Ezys'를 토대로 한 해외 송금과 AI 에이전트 결제 사례를 소개했다. 박 대표가 짚은 기존 송금 구조의 핵심 문제는 수수료나 정산 지연이 아니었다. 그는 미리 자금을 보내둬야 하는 '선급금(프리펀딩)'을 가장 큰 걸림돌로 꼽았다.
박 대표는 "1000억원을 미국으로 송금하려면 미국에 1000억원 규모의 자금이 미리 나가 있어야 한다"며 "해외에 묶인 자금을 국내에서 유동화하면 경제에 더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원장 기반 디지털 자산으로 은행 간 신뢰를 확보해, 선급금 없이도 지급이 이뤄지게 하는 구조다. AI 에이전트 결제에 대해서는 0.01달러 단위의 초소액 거래를 감당하면서 인프라 단가를 유지하는 사업성이 관건이라고 덧붙였다.
▲ "M2M 결제, 5년 내 현실로"
기술적 해법이 무르익는 가운데, 실제 도입 시점을 두고는 견해가 갈렸다. 이어진 'AI 에이전트 시대의 스테이블코인' 패널 토론에서는 기기 간(M2M) 결제가 언제 현실화할지가 쟁점에 올랐다. 좌장은 박지수 대표가 맡았고, 니키 아리야싱헤 체인링크 아시아태평양·중동 부사장과 허민강 KB금융지주 DT추진부 차장, 윤민섭 빗썸 이사, 강병하 메리츠증권 전략기획담당 상무가 패널로 참여했다.
전망의 폭은 넓었다. 니키 부사장은 "초기 징후가 이미 나타나고 있으며 2027년 본격적으로 가속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병하 상무는 "거리감은 있으나 그 지점에 도달하는 속도는 매우 빠를 것"이라며, 결제 시간 단축(T+2→T+1→T+0) 흐름이 AI 에이전트 기반 결제 도입을 불가피하게 만든다고 진단했다. 반면 윤민섭 이사는 외국환거래법 등 규제 충돌과 책임 귀속 문제를 들어 "5년 정도는 걸릴 것"이라며 신중론을 폈다.
시점을 둘러싼 견해차와 달리, 풀어야 할 과제에는 대체로 공감대가 모였다. 허민강 차장은 24시간 온체인 정산을 지원하는 금융 인프라로의 전환을 선결 과제로 꼽으며, 트랜잭션 폭증에 대비해 'KYA(Know Your Agent)' 관점의 통제 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제안했다. 윤민섭 이사는 AI 에이전트가 법인격을 갖지 못한 현행 법제에서는 결국 소유자에게 모든 책임이 귀속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짚었다.
▲ "안 하면 도태된다"
과제가 산적해 있지만, 도입을 미룰 수는 없다는 데 토론의 무게가 실렸다. 강병하 상무는 블록체인 도입을 기업 생존의 문제로 규정했다. 도입한다고 특정 기업의 수익이 곧바로 오르지는 않더라도, 시장 지위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는 "스테이블코인이나 토큰증권을 하면 돈을 버느냐는 질문을 받지만, 반대로 하지 않으면 망할 수도 있다"고 했다. 다만 그는 "모든 자산을 토큰화할 수 있더라도, 필요한 것만 선택적으로 토큰화하면 된다"며 속도 못지않게 방향이 중요하다는 점을 함께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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