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 줄 평
“죽음의 무대 위에서 춤으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듯하다.”
▲시 한 편
<복숭아나무 옮겨심는 법> - 윤진화
털 달린 과일을 손으로 쓰다듬는 일요일
오늘 만난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복숭아를 던져요
아무렇게나 버렸듯 아무렇게나 구르고
단단한 과육이 물러 터지는데도
복숭아를 가르고 애인과 나눠 먹는다
과일 밖으로 비명이 터지고
굴러간다 여기서 저기 저기서 멀리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아무리 흔들어도 더는 나올 것이 없어요
처음부터 빈 깡통 그런데도 복숭아가 자랐다
새로 나온 품종인가요
웃다가 뒤적이고 섞고 흔들었다
발로 찼다 헤어졌다 서로 들어갔다 빠져나왔다
흙이 마르기 전에 서둘러
복숭아를 옮겨 심으면 죽을 수 있어요
복숭아를 입 안에 넣던 애인이
캑 캑 목을 부여잡는다
복숭아가 툭 튀어나와 구른다
날 죽이려고 작정했군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잖아
▲시평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잖아”라는 마지막 문장에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 들어있다. 냉소적 체념이 묻어나는 이 문장은 슬프지만, 자율 의지가 아닌 강요나 잘못된 선택에 대한 비웃음인 동시에 비루한 삶에 시원한 한 방을 먹인다. 문맥상으로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라고 해야 하지만, 앞의 문장 “날 죽이려고 작정했군”으로 인해 전복적 발상이 생겨난다. ‘죽음’의 자리에 ‘삶’이 들어감으로써 사랑에 몰빵하거나, 관계에 헌신하거나, 미래를 기대하는 따위의 환상을 한순간에 깨버린다. 애인의 목에 걸린 복숭아와 그의 태도가 그런 환상을 깨뜨리고 자각하는 계기가 된다. 시의 화자에게 가장 위험한 건 죽음이 아니라 ‘열심히 사는 것’이다. 열심히 살지 않겠다는 다짐은 삶의 이종과 화자를 대하는 애인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아무렇게나 복숭아를 던”지거나, “옮겨 심으면 죽을 수 있”는 데도 서둘러 이식하(려)는 사람들 때문이다. 나무를 옮겨 심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익숙한 터전에서 뿌리째 옮겨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일이다. 사람으로 치면 이사, 독립, 결혼, 출산, 이혼 같은 삶의 분기점에 해당한다. 일련의 과정을 복숭아나무 옮겨 심는 것으로 은유한다. 이 시에서 복숭아는 과일이면서 화자의 분신이다. 첫 행에서는 쓰다듬는 행위와 맞물려 사랑받는 듯한,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오늘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 사랑과 평화는 깨지고 만다. 그들은 쉽게 물러 터지는 복숭아를 던지고, 버리고, 굴린다. 존중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일요일”은 시간적 배경이나 화자가 태어난 요일일 수 있는데, 마지막 행 열심히 사는 평일과 대조를 이룬다. 산다는 것은 일요일의 휴식이 아니라 평일의 노동이다. 한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나아지는 건 없다. 심신만 고단하고, 관계는 피곤할 뿐이다. 처음부터 삶의 배경이 “빈 깡통”, 즉 흙수저라면 열매를 맺는 것도 기적이다. “그런데도 복숭아가 자”라고, 그 과정은 악전고투다. “웃다가 뒤적이고 섞고 흔들”린다. 관계의 진흙탕에 빠졌다가 간신히 빠져나온다. 그리곤 깨닫는다, 다 부질없다는 것을.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는 것도 결국 삶을 옮겨 심는 일이다. 이후 새로 정착한 곳의 요일은 늘 ‘주말’이다. 스스로 “쓰다듬는” 일요일 같은 삶이다.(김정수 시인)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의 잠』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과 평론집 『연민의 시학』을 냈다. 경희문학상과 사이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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