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타이중미술관에 심어진 양혜규의 우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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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타이중미술관에 심어진 양혜규의 우주나무

바자 2026-06-02 07:00:00 신고


블라인드 신목 그늘 아래에 서면


양혜규가 지난 12월 13일에 개관한 대만의 타이중미술관에 우주나무를 심어두었다. 모두를 굽어살피는 나무는 이방인이 공동체에 보내는 예술적 소통의 메시지다.


Courtesy of the artist and Taichung Art Museum, Photo by Chen Wan Ning, 2025
Courtesy of the artist and Taichung Art Museum, Photo by Chen Wan Ning, 2025

대만 타이중미술관 곳곳에서는 예술이 지역 공동체에 어떻게 먼저 기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 흔적들이 보인다. 사소하게는,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기존 현대미술계의 그것과는 다른 질서를 감각으로 먼저 경험하게 된다. 건물을 띄워 올린 덕분에 뙤약볕을 받아줄 그늘과 자유롭게 넘나드는 바람을 얻었다. 안팎의 경계가 사라진 그 자리에, 어떠한 작업도 동시대적 프로젝트로 회복시킬 수 있고, 또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다. 나들이 온 관객들, 망중한을 즐기는 지역민의 고유한 활력이 “자연과 일상, 그리고 예술의 공존”이라는 뻔한 문장을 맥동케 한다. 이들의 호기심 어린 발걸음은 미술관의 중심, 양혜규가 심어둔 거대한 나무 아래에서 더욱 생생해진다. 예술가는 관람객들의 심정을 감히 짐작할 수 없다지만, 양혜규의 블라인드 나무는 기꺼이 모두를 굽어살핀다. “저는 이 작업이 이제 막 문을 연 이 공간에 뿌리내려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나무가 되기를, 지역 공동체와 모든 일원을 돌보는 존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유동 봉헌 – 삼합 나무 그늘(Liquid Votive ― Tree Shade Triad)〉(2025)이라는 이름의 이 ‘우주나무’는 여러 문화권에서 전해지는 고목 숭배 전통에서 영감을 받았다. 생각해보면, 동네마다 오래된 나무가 한 그루씩은 있었던 것 같다. 이들은 마을이나 공동체의 수호신으로 숭배되기도 했고, 정신적 유대의 장소로도 여겨졌다. 하늘과 땅, 인간과 세상을 잇는 임무를 띤 나무들은 보통 한국에서는 당산나무, 일본에서는 신목, 인도에서는 보리수라 불린다. 특히 대만에서는 다수공(大樹公)이라 하는데, 말 그대로 ‘큰 나무 어르신’이라는 뜻이다. 양혜규는 작업에 착수하기 전 현지 조사를 통해 여러 ‘어르신’들을 직접 대면했고, 자연과 사물, 세상 모든 것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인류의 오래된 신앙인 애니미즘을 참조했다. 공동체와 유대감의 모티프로 다뤄져온 나무를 ‘심고’ 지역에 ‘봉헌’함으로써, 타이중미술관 아트 커미션의 첫 주자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분명히 한 셈이다.

“공동체의 상상력에 바탕하되, 국제적인 동시대 미술의 흐름과 지역 관객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이는 곧 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매일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동시에 세계 여러 지역을 이동하며 관계를 맺는 것 또한 제 일부가 되었으니까요. 애니미즘에서 출발했지만, 그렇다고 나무를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었어요. 다만 물리적으로 ‘크다’는 개념에 대해 고심해 봤습니다. 위압적이거나 고압적인 느낌보다는 친근한 동시에 우러러볼 수 있고 경이로운 느낌, 그리고 밤에는 미스터리하면서 신비로운 느낌…. ‘크다’는 건 사실 ‘오래됐다’는 뜻이기도 하죠. 큰 폭포수, 큰 바위, 큰 나무…. 이런 것들이 주는 느낌은 현대문명의 스펙터클과는 다릅니다. 그건 존경과 존중의 의미에 더 가까워요.”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유동 봉헌〉을 우러르다 보니, 지난해 내셔 조각 센터에서 선보인 미니어처 조각 〈아담한 봉헌〉이 떠올랐다. 솔방울과 조약돌 같은 대상에 자연과 문명의 순리를 담은 이 자그마한 조각군은 양혜규 작품 중 가장 크기가 작은 축에 속한다. 반면 27m 높이에 달하는 로비에 걸린 〈유동 봉헌〉은 역대 블라인드 설치작 중 최대 규모다. 세 개의 몸체로 구성된 나무가 하늘을 대지 삼아 거꾸로 심어진 듯 보이기도, 하늘을 향해 상승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짙은 녹색, 붉은색, 황갈색, 갈색 등 자연을 연상시키는 깊고 낮은 채도의 블라인드가 어우러지고, 어느 부분에서는 색감과 광택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 중간중간 배치된 직선 및 곡선 형태의 빛을 품은 LED 조명은 블라인드 사이사이에서 은은한 생기와 율동감을 부여한다. 압도적인 크기도 그렇거니와 수형 또한 다채로워서, 어디서,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매번 다른 형태와 색, 그리고 표정을 포착할 수 있다. 즉 이 나무가 자리하게 될 2년 동안 모두에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기억될 거라는 얘기다. 나는 수직의 형태로 걸린 이 모듈형 나무가 언젠가 수평으로 펼쳐져 숲을 이룰 그날을 상상해 보았다.

특히나 미술관 로비 공간과 이를 둘러싼 나선형 경사로의 건축적 비전을 적극 반영한 〈유동 봉헌〉은 양혜규가 예술 작품과 건축적 공간의 상관관계를 얼마나 대담하게 해석하고 정교하게 실행하는지를 다시금 주지시킨다. 타이중미술관과 타이중 공공도서관을 통칭하는 ‘타이중 그린 뮤지엄브러리(Taichung Green Museumbrary)’는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세계적인 건축 사무소 사나(SANAA)의 메가 프로젝트다. 사나는 대표 재료인 순백색의 알루미늄 메탈 메시가 광대한 건물 전체를 감싸안으며, 문화, 예술 그리고 자연의 경계를 부드럽게 넘나들도록 했다. 투명하게 가벼워진 건물은 환경과 변화무쌍하게 상호작용하는데, 예컨대 볕이 좋은 날에는 내부가 더 넓게, 흐린 날에는 하늘 속으로 건물이 거의 녹아 드는 듯 느껴지는 식이다.

환경과 융합해 그 일부가 되고자 한 의도는 여덟 개의 건물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경사로에서 극대화된다. 나는 경사로를 오르내리며, 이 설치작을 통해서 비로소 명료해진 공간 특유의 규모와 느낌을 만끽했다. 옛 군용 공항이었던 생태공원의 풍경과 양혜규의 작업을 양쪽에 두고 산책했는데, 이는 각자의 방식으로 숱한 ‘안과 밖’, 즉 중심과 주변,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세계를 다루어온 이들의 언어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Courtesy of the artist and Taichung Art Museum, Photo by ANPIS FOTO, 2025
Courtesy of the artist and Taichung Art Museum, Photo by ANPIS FOTO, 2025

사나의 건축물이 양혜규의 나무에 비옥한 토양이 되어줄 거라는 믿음은, 제목이 시사하듯 이 조각 작업이 매 순간 유동적인 상태에 놓임으로써 비가시적인 움직임의 개념을 형성할 거라는 기대와도 이어진다. 〈유동 봉헌〉은 하루하루 다른 시간을 산다. 해가 뜨면 깨어나고 해가 지면 잠에 든다. 시종일관 인공조명에만 의존해야 하는 일반의 작품들과는 달리, 날씨와 기후 같은 비물질적 환경 요소를 변수로 용감히 받아들인다. 시시각각 다른 풍경을 펼쳐내는 작품은 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공간과 관객에게 고스란히 헌납한다. 강한 햇빛 아래서 작품과 건축물은 선명한 기하학적 그림자를 그려낸다. 해의 움직임에 따라 그림자는 그늘이 되어 제4의 공간을 만들기도, 작품 안에 스며들기도 했다. 노을이 인상적인 일몰을 지나 밤이 되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다채롭던 색과 빛은 잦아들고, 어둑해진 나무를 지키는 LED 조명이 시원시원한 빛의 획을 긋는다. 미술관은 5시에, 도서관은 9시에 문을 닫지만 〈유동 봉헌〉은 10시까지 불 밝히며 공원을 찾은 이들에게 창 너머의 예기치 못한 신비로운 풍경을 선사할 것이다.

양혜규는 감각적 설치, 신체적 조각, 한지 콜라주, 디지털 그래픽을 활용한 벽지 작업 등 실로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왔다. 그중에서도 베네치안 블라인드는 단연 작가의 대표 조형언어로 작업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성취와 긴밀하게 연결된 만큼 블라인드 작업에 유난히 엄격한 양혜규는 지속적으로, 꼼꼼히 그 변천사를 써왔다. 색, 빛, 소리 등의 다감각적이고도 멜랑콜리한 경험의 공간을 만들어냈고, 역사적 내러티브와 인물들을 현재로 소환했으며, 반대로 그간의 서사를 완전히 ‘잊고(unlearn)’ 순수하게 추상의 체계를 탐구하는 데 몰두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양혜규의 블라인드 작업에는, 이를테면 서로에 대한 이해가 길들여지는 것에 대한 일종의 부정 혹은 서사와 추상의 이분법을 거부하는 저항의 의미 등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지역 정체성과 영적 세계의 접합 지점을 정직하게 추상화한 〈유동 봉헌〉은 다소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전시 자체보다 보는 이들의 존재에 더 집중한, 이토록 자상하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공감과 기원의 마음을 듬뿍 담은 블라인드 작업이 또 있었던가. 지각과 감정, 그리고 집단적 경험을 생생하게 매개하고 이를 삶으로 현실화하는 〈유동 봉헌〉은 양혜규의 블라인드 설치작 중 흔치 않게 따뜻하고 직관적이며, 그래서 자유롭다.

내가 아는 한 양혜규는 예술이든 삶이든 자신의 입에 넣고 씹어 삼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지난 초여름, 우리는 하반기에 집중되어 있던 아시아 기반의 프로젝트, 특히 2025년 대만의 가장 중요한 문화 인프라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나누었다. ‘대만의 중심’이라는 뜻을 가진 이 도시 문화를 견인하고자 하는 타이중미술관의 성숙한 패기, 오늘날 문화예술의 선두에 선 현대미술관의 역할 등을 오간 이날의 대화는 양혜규가 대만에서 첫 대규모 커미션 작업을 감행한 이유를 부연했다. 물론 ‘시작(inaugural commission) 전문 작가’라 자조할 만큼, 그는 뉴욕현대미술관 재개관, 홍콩 M+ 개관 등 어떤 프로젝트나 미술관의 의미 있는 (새)출발에 자주 함께해왔다. 하지만 스스로 기준이 되고 이를 끊임없이 갱신하는 작가로서의 열망만큼이나 지극한 아시아 미술 신 및 문화를 향한 애정이, 〈유동 봉헌〉에 담겨 있다. 이번에 양혜규는 ‘심는다’는 은유적인 표현을 유독 자주 썼는데, 이는 나무에 영감 받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한 번도 다뤄진 적 없는 미지의 공간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를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저녁을 먹다 말고 잰 걸음으로 다시 밤의 미술관을 찾을 이유는 충분했다. 공간을 획기적으로 전유하고자 한 조각가의 야심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작은 존재를 통해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낮에는 희미하던 초록빛의 작은 점들이 한결 또렷해졌다. 이들은 고정된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벽과 바닥, 작품 사이를 유유히 떠다니며, 경사로를 산책하는 이들의 머리와 가슴에 내려앉는다. 신목을 지키는 반딧불이처럼, 이 반짝이는 점들은 공간 전체를 신성한 기운으로 활성화한다. 아무리 대단한 작품이라도 어떤 공간을, 누군가의 삶을 독차지할 수는 없다. 누구보다 이를 잘 아는 양혜규는 공간과 예술, 이를 향유하는 이들의 존재를 총체적으로 인지하고 연결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했다. 기념비적 조각을 늘 의심하고 경계하는 그가 만들어낸 몰입적 순간,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무위의 공동체가 생겨난다. 영원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예술가가 이 땅에 사는 이들에게 보내는 겸손한 환대의 메시지. 이 대화와 소통의 제스처가 바로 작금의 현대미술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내 즐거운 아이처럼 ‘여기, 지금’의 모두를 이어내는 반딧불이를 따라다녔다, 블라인드 신목 아래에서.


윤혜정은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인생, 예술〉,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등을 썼다. 이 세 가지 책에 모두 양혜규가 포함되어 있는데, 쓸 때마다 다른 감흥을 선사하는 작가는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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