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 확보를 명분으로 대규모 약가 제도 개편을 예고하면서 국내 제약업계 전반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추진 중인 이번 개편안의 골자는 제네릭(복제약) 의약품의 상한 가격을 기존 오리지널 대비 50%대에서 40%대 초반으로 일괄 조정하는 것이다. 정부는 건보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제약 현장에서는 이번 조치가 단순한 기업 매출 감소를 넘어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의 핵심 성장 동력인 연구개발(R&D) 생태계를 뿌리째 흔들 수 있다며 비틀거리고 있다.
자금줄 막힌 R&D, 꺼져가는 신약 개발 엔진
국내 전통 제약사들의 사업 구조를 살펴보면 복제약 판매를 통해 얻은 안정적인 현금 흐름(캐시카우)을 기반으로 수년에서 수십 년이 걸리는 신약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재투자하는 선순환 구조가 주를 이룬다.
실제로 글로벌 빅파마와 달리 국내 기업들의 매출에서 제네릭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의 일괄적인 약가 인하가 단행될 경우 당장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에 달하는 매출 공백이 고스란히 영업이익 적자나 급감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 중견 제약사의 R&D 본부장은 "당장 눈앞의 마진이 급감하면 기업 입장에서는 가장 먼저 성공 확률이 낮고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미래 신약 파이프라인 투자부터 줄이거나 잠정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정부가 공언해 온 '바이오·헬스 글로벌 중심국가 도약'이라는 슬로건이 무색하게도, 정작 산업 현장의 R&D 엔진은 기름이 떨어져 꺼질 위기에 처한 셈이다.
저가 수입 원료 의존에 '의약품 주권' 흔들려
원료의약품의 국산화와 보건 안보 측면에서도 심각한 부작용이 예상된다. 약가가 강제로 낮아지면 제약사들은 생존을 위해 극단적인 원가 절감에 나설 수밖에 없다.
이는 상대적으로 단가가 높은 국산 원료의약품 대신 가성비가 좋은 인도나 중국산 저가 원료로 눈을 돌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현재도 국내 원료의약품 자급률이 20% 안팎으로 매우 낮은 상황에서 해외 의약품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향후 글로벌 물류 대란이나 국가 간 분쟁, 혹은 감염병 재유행 등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필수 의약품 품귀 현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
특히 채산성이 맞지 않는 퇴장방지의약품이나 원가가 높은 필수의약품의 생산을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상황이 속출한다면, 결국 환자들이 필요한 약을 구하지 못하는 '의약품 주권 상실'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고용 한파와 법적 방어막 해제, 사면초가 빠진 업계
고용 시장에 미칠 파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제약 산업은 일반 제조업에 비해 고용 유발 효과가 높은 대표적인 지식 집약적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그러나 약가 인하로 인한 직격탄은 생산 공장의 라인 축소와 영업·마케팅 인력의 대규모 감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노동계와 업계 내부에서는 이번 개편안이 유예 기간 없이 강행될 경우 제약·바이오 종사자 중 만 명 이상이 구조조정과 실직 위기에 내몰릴 수 있다는 구체적인 경고등까지 켜진 상태다. 인력 감축은 결국 숙련된 연구·제조 인력의 이탈을 부르고, 장기적으로는 국내 공장의 글로벌 경쟁력 저하라는 악순환을 낳게 된다.
정부는 혁신형 제약사 우대나 국산 원료 사용 시 약가 가산 등의 완충 지대를 마련하겠다고 하지만 현장에서는 "문턱이 너무 높아 대형사 몇 곳만 혜택을 보는 생색내기용 정책"이라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사법부 역시 최근 리베이트나 약가 인하 관련 소송에서 정부의 손을 들어주는 추세여서 제약사들이 법적 절차를 통해 시간을 벌거나 방어막을 칠 수 있는 통로마저 차단됐다.
제약업계는 정부의 건보 재정 절감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산업의 고유한 생태계를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약가 쥐어짜기'가 결국 국내 제약사들을 고사시키는 자해 행위가 될 수 있다고 토로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 K-제약에 필요한 것은 규제 일변도의 압박이 아니라 기업들이 신약 개발이라는 본연의 가치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유연한 약가 산정과 실질적인 R&D 인센티브를 결합한 세련된 정책적 타협점"이라고 말했다.
[폴리뉴스 김진우 기자]
Copyright ⓒ 폴리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