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산타령은 흔히 산을 노래하는 민요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문화사적 의미는 훨씬 넓다. 여러 명의 소리꾼이 줄지어 서서 앞소리와 뒷소리를 주고받고, 장단과 몸짓이 어우러지며 하나의 공동 감각을 만들어내는 공연 예술에 가깝다. 특히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선소리산타령’은 서울과 서도 지역의 도시 민속문화가 결합한 집단 성악 양식으로서 한국 전통 공연문화의 중요한 축을 형성해왔다.
산타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소리’라는 개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소리는 문자 그대로 서서 부르는 노래를 뜻한다. 좌정한 상태에서 부르는 잡가나 판소리와 달리, 선소리꾼들은 몸을 움직이며 음악과 동작을 함께 수행한다. 모갑이라 불리는 앞소리꾼이 장구를 메고 선창하면, 나머지 소리꾼들이 소고를 치며 후렴을 받아 합창하는 구조가 기본 골격이다. 이 과정에서 발림이라 불리는 손짓과 발짓이 함께 어우러져 음악은 청각을 넘어 시각적 공연성까지 확보한다.
선소리산타령의 기원은 조선 후기 도시 민속문화의 성장과 맞닿아 있다. 오랫동안 서울 오강(五江) 일대 소리꾼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 정설처럼 전해졌으나, 음악사 연구는 보다 오래된 뿌리를 지목한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활동한 소리꾼 의택과 종대의 존재는 이미 그 이전부터 전문 유랑예인 집단과 구별되는 선소리 전승층이 형성됐음을 보여준다. 이는 산타령이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음악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도시와 장터, 유랑 예능 문화 속에서 성장했음을 시사한다.
그 뿌리에는 사당패 문화가 있다. 조선 후기 전국을 순회하던 사당패는 노래와 춤, 곡예와 연희를 결합한 대중 오락 집단이었다. 이들이 부르던 산천초목 계열 노래와 산타령 계통의 음악은 이후 서울 오강 일대 소리꾼들에 의해 재구성되며 새로운 음악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선소리산타령에서 발견되는 활달한 리듬과 집단적 호흡, 극적인 장단 전환은 사당패 공연문화의 흔적을 품고 있다.
1915년 간행된 ‘무쌍신구잡가’는 산타령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현재 경기 선소리산타령의 첫 곡인 ‘놀량’을 당시에는 ‘판염불’이라 기록했는데, 이는 산타령이 불교적 의례 음악과도 일정한 연관을 가졌음을 말해준다. 거리의 대중예술처럼 보이는 산타령 내부에 종교적 음률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조선 후기 음악 교류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산타령은 대개 네 곡의 레퍼토리로 구성된다.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자진산타령’이 그것이다. 경기 지역에서는 마지막 곡을 ‘도라지타령’이라 부르기도 하고, 서도에서는 ‘경발림’ 혹은 ‘경사거리’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곡목의 차이는 지역 문화가 동일한 음악을 자기 방식으로 변주한 흔적이기도 하다.
첫 곡인 ‘놀량’은 산타령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 고음역에서 힘차게 질러 올리는 창법과 경쾌한 리듬은 마치 거리 축제의 함성과 닮았다. 이후 ‘앞산타령’과 ‘뒷산타령’, ‘자진산타령’으로 이어지면서 음악은 보다 안정적이고 정서적인 흐름으로 이동한다. 흥겨움 속에서도 서정이 살아 있는 구조는 공동체 놀이 문화의 감정 리듬을 반영한다.
산타령 가사는 산천 풍경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계절의 변화와 자연 풍광을 읊으며 흥취를 북돋운다. 그러나 자연 예찬에만 머물지 않는다. 특히 서도 산타령에서는 남녀 간 애정과 이별 정서를 담은 대목이 추가되며 대중적 공감대를 넓혔다. 서울에서 출발한 음악이 평양을 거치며 감성의 스펙트럼을 확장한 셈이다.
경기산타령과 서도산타령의 차이는 음악사적으로도 흥미롭다. 경기 선소리산타령은 곡 안에서 템포 변화가 크다. 느리게 시작해 점차 속도를 높이며 공연의 열기를 축적한다. 반면 서도산타령은 각 곡의 템포가 상대적으로 일정하다. 빠른 속도와 서도 특유의 창법을 결합해 보다 대중 친화적 음악으로 발전했다.
흥미로운 점은 서도산타령이 오히려 대중적 인기를 앞질렀다는 사실이다. 20세기 초 음반과 방송 기록을 살펴보면 서울보다 평양 기반 산타령이 더 널리 소비된 흔적이 발견된다. 일부 연구자들이 후기 경기 선소리산타령이 오히려 서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는 중심에서 주변으로만 이동하지 않는다. 지역은 언제든 새로운 중심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선소리산타령은 남성 집단 합창이라는 특징도 지닌다. 원래는 서울과 한강 일대 남성 소리꾼들이 명절과 야외 놀이에서 함께 부르던 음악이었다. 정월대보름 답교놀이와 화전놀이 같은 공동체 행사에서 산타령은 놀이와 의례, 친교를 연결하는 매개 역할을 했다. 음악은 전문 무대의 산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이 점에서 산타령은 민간 성악의 독특한 전통을 보여준다. 판소리가 전문 광대 중심의 개인 예술이라면 산타령은 집단적 호흡 속에서 완성되는 생활 예술에 가깝다. 전문 직업 음악인이 아니더라도 수준 높은 기량을 축적한 오강의 소리꾼들은 스스로 향유하고 전승하는 방식으로 음악 공동체를 유지했다.
서울에서 형성된 산타령의 영향력은 전국으로 퍼졌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도입창, 전라도 지역의 남도입창은 그 연쇄적 결과물이다. 특히 남도입창은 ‘보렴’과 ‘화초 사거리’를 중심으로 전승되며 경·서도와는 다른 구성을 보여준다. 같은 ‘입창’ 범주 안에서도 지역별 미학이 얼마나 풍부하게 갈라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1968년 선소리산타령이 국가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면서 ‘선소리산타령’이라는 명칭은 제도적으로 공식화됐다. 이후 보존회와 전승 교육을 중심으로 공연과 기록 사업이 꾸준히 이어졌다.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급속히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공동체 음악이 국가 차원의 보호 체계 안으로 편입된 순간이었다.
다만 무형유산 지정 이후 산타령은 새로운 과제와도 마주했다. 본래 들판과 강변, 놀이판에서 불리던 음악이 극장 무대 중심으로 옮겨가며 공연 방식 역시 달라졌다. 생활문화였던 산타령은 점차 ‘감상용 공연예술’의 성격을 띠게 됐다. 살아 있는 공동체 문화와 보존 체계 사이의 균형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오늘날 선소리산타령은 전통음악 공연장에서 접하는 문화유산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그 본질은 훨씬 역동적이다. 사당패 유행가의 흔적과 불교 음악의 음률, 서울 상인과 한강 노동 공동체의 흥, 평양 대중문화의 감성이 한데 얽히며 형성된 도시 민중 예술이다.
산타령은 산을 노래하지만, 실상 그 노래가 품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삶이다. 함께 서서 소리를 맞추고 장단을 주고받으며 공동의 시간을 축적했던 기억이 그 안에 남아 있다. 그래서 선소리산타령은 오래된 민요를 넘어, 한국 사회가 집단적 즐거움과 연대의 감각을 어떻게 음악으로 구현했는지 보여주는 살아 있는 문화사라 할 만하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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