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0년 보스턴의 겨울 밤, 세관 건물 앞에서 총성이 울렸다. 사망자는 단 5명. 규모만 보면 '학살'이라는 단어가 붙기엔 민망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미국 독립 전쟁의 결정적 도화선이 됐고, 지금도 보스턴 한복판 바닥에 그 현장이 새겨져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답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지배받는 땅이 지배하는 나라보다 더 많이 읽었다
1765년 기준, 미국 식민지의 문해율은 90%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반면 영국 본토의 평균 문해율은 50%에 불과했다. 식민지 주민 열 명 중 아홉이 글을 읽을 수 있었고, 그 반대편 본국에서는 두 명 중 한 명이 문맹이었다는 뜻이다.
이유는 청교도 정신에 있었다. 성경을 직접 읽기 위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글을 익혔고, 그 결과 식민지 전역에 신문과 팸플릿이 활발하게 유통됐다. 정보가 빠르게 퍼지고, 여론이 쉽게 형성되는 구조였다. 이 사실이 이후 모든 사건의 토대가 된다. 글을 읽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분노도 그만큼 빠르게 퍼진다는 의미였으니까.
■ 종이에 세금을 — 인지세(Stamp Act)의 등장
높은 문해율을 눈치챈 영국 의회가 움직였다. 1765년, 미국 땅에서 유통되는 모든 종이에 영국 도장을 찍게 하고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다. 신문, 계약서, 유언장, 팸플릿, 심지어 카드놀이 용지까지. 영국의 도장이 없으면 유통 자체가 불법이었다. 이게 바로 인지세(Stamp Act)다.
생각해보면 기막힌 발상이다. 글을 읽는 사람이 가장 많은 곳에, 종이에 세금을 매긴 것이다. 타깃이 너무 정확했다. 신문을 만드는 사람, 법률 문서를 다루는 사람, 상업 계약을 하는 사람 — 당시 식민지 사회를 굴리던 모든 사람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반발이 폭발적이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One penny stamp
■ 자유의 아들들 — 급진 조직의 탄생
인지세 소식이 퍼지자 독립운동가 새뮤얼 애덤스가 움직였다. 그가 결성한 조직이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이다. 세관 건물을 불태우고, 영국 관료의 인형으로 화형식을 여는 등 과격한 방식으로 저항 의사를 드러냈다. 직접적인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당시로선 충분히 급진적인 집단이었다.
당시 매사추세츠 총독 허친슨의 이야기는 이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난 법대로만 살았는데 왜 도망가야 하냐"고 버텼지만, 이미 다른 관리들의 집은 박살이 난 상태였다. 결국 뒷문으로 야반도주했고, 그의 저택도 성난 군중에 의해 쑥대밭이 됐다. 법보다 민심이 앞선 시대였다.
같은 해 뉴욕에서는 각 주 대표들이 모여 인지세 회의(Stamp Act Congress)를 열었다. 처음부터 독립을 목표로 한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것이 식민지가 하나로 뭉친 첫 번째 공식 연대였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지는 첫 장면이었던 셈이다.
[AI 생성] 자유의아들들 새뮤얼 애덤스 참고사진
■ 이겼다, 그런데 왜 더 화가 났을까
거센 저항에 밀린 영국 의회는 1년 만에 인지세를 폐지했다. 식민지 주민들에겐 엄청난 자신감이 됐다. "우리가 뭉치면 이길 수 있다"는 경험이 생긴 것이다. 이때 등장한 구호가 바로 "대표 없이는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다. 영국 의회에 우리 대표가 없는데 어떻게 세금을 거두냐는 논리였고, 이 구호는 이후 미국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슬로건이 된다.
그런데 영국 의회는 인지세를 폐지하면서 동시에 선언법(Declaratory Act)을 슬그머니 통과시켰다. 내용은 간단했다. "식민지의 모든 입법 권한은 영국 본토에 있다." 세금은 없애줬지만 주권은 통째로 가져간 것이다. 인지세 폐지에 환호하던 주민들이 선언법의 내용을 파악하자 분노는 오히려 더 깊어졌다. 영국 의회가 식민지를 얼마나 얕보고 있는지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 눈덩이가 총성이 됐다 — 보스턴 학살
그렇게 5년간 쌓인 분노가 1770년 겨울 밤 터졌다. 보스턴 세관 건물 앞에 시위대가 모였고, 군중은 건물을 지키던 영국 병사들에게 눈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병사들이 총을 발포했다. 5명이 죽었다.
숫자만 놓고 보면 '학살'이라는 단어는 과하다. 그런데 문해율 90%의 나라에서 이 사건은 완전히 달랐다. 신문은 다섯 개의 관 그림과 함께 "영국군이 우리 시민을 학살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종의 선동이기도 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주민이 신문을 읽는 나라에서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소식은 순식간에 13개 주 전역으로 퍼졌다. 이미 인지세와 선언법으로 끓고 있던 독립 열망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사건의 이름이 '보스턴 학살'로 굳어진 것 자체가, 당시 미디어가 여론을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글을 읽는 사람이 많을수록 이야기는 더 멀리 퍼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역사를 바꿨다.
지금도 보스턴을 방문하면 보스턴 자유의 길(Boston Freedom Trail)을 따라 걷다 바닥에 새겨진 보스턴 학살 현장 표식을 직접 볼 수 있다.
HORRID MASSACRE
■ 문해율이 역사를 바꿨다
인지세 하나로 시작된 균열이, 선언법이라는 기름을 만나 보스턴 학살이라는 폭발로 이어졌다. 1776년 독립선언까지 아직 6년이 남아 있었지만, 식민지 주민들의 마음속에서 독립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역사가 흥미로운 건 이런 지점이다. 미국 독립의 불씨는 총이나 칼이 아니라 종이와 잉크에서 시작됐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분노는 더 넓게, 더 빠르게 퍼졌다. 영국이 종이에 세금을 매긴 건 어쩌면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 편에서는 342상자의 차가 보스턴 바다에 수장된 날, 보스턴 티파티와 미국 독립의 마지막 불꽃을 다룬다.
※ 이 콘텐츠는 유튜브 채널 어쩌다인문학의 강의 영상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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