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와 우리의 그림
이우성의 그림이 말을 건다. 너와 우리를 호명하자 그림은 나의 이야기가 된다.
작업을 아카이빙 해두는 홈페이지에 이번 전시와 관련한 네 편의 글이 올라와 있어요. 작업 노트라기엔 헤어진 연인에게 부치는 편지 같은, 아주 사적인 글이었고요.
글만 읽어서는 좀 부족할 거예요. 나머지 정보를 채우기 위해 전시 보러 오라는 거죠.(웃음) 2024년 봄 즈음이었을 텐데. 철저히 혼자가 된 시간이 있었어요. 소속되어 있던 갤러리를 나오고, 작업실과 살던 집의 이사 시기가 겹치고, 오래 만난 애인으로부터 이별 통보도 받았던, 일련의 일들이 겹치면서 하루아침에 주변 환경이 바뀐 거예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앞으로의 계획이랄 게 하나도 없는 채로 혼자 남게 된 거죠. 그 시기를 통과한 뒤 작업을 시작하며 쓴 글인데, 저는 전시 제목도 그렇고,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생각할 때 글이 써지더라고요. 이번 전시의 정서와 준비한 동안의 고민이 잘 표현되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 올려뒀어요.
대부분의 작품이 도시나 자연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 글에서 밝힌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느껴져요. 사람을 그리지 않았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도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거죠.
저는 일상을 자주 사진으로 남기는 편인데요. 애인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다시 보는데 문득 풍경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사람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작업을 많이 했으니 이제는 조금 멀리서 담아보고 싶은 거죠. 어쩌면 많이 지쳤던 것일 수도 있고요. 앞서 말한 일들을 겪고서 잠시 여행을 다니며 쉬다가, 다시 작업을 시작할 땐 일기를 쓰는 마음이었어요. 전시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을 어떻게든 남겨놓기 위해 일단 10점을 그리는 것이 목표였으니까요. 3년 전 그렸던 자화상 연작에 노랗고 둥글둥글하게 생긴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그 친구들이 어디론가 떠나는 장면을 상상했어요. 뚝섬유원지, 한강대교, 종로3가, 강릉 경포해변, 제주 정방폭포. 그야말로 도시와 자연을 두루 여행하다가 마지막에는 달집을 태우는 데서 다 같이 만나는 거예요. 〈너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까?〉가 그 장면이에요. 만약 꿈에서 만난다면 〈꽃이 핀 들판에서 우리〉와 같은 풍경이었을 거고요. 신기하게도 작업을 하면서 모든 게 괜찮아지기 시작했어요. 헤어졌던 애인과 다시 만나고, 갤러리도 생기고, 새로운 작업실에도 적응을 한 거죠. 모든 작업을 마무리하고 전시를 하고 있는 지금은 더할 나위 없고요.(웃음)
10여 년 전 작업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림도 있었습니다. 〈너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까?〉의 치솟는 불길을 보면서는 2011년에 그린 오리배가 불타고 있는 그림 〈아무도 내 슬픔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를 떠올렸고, 〈저 왔어요〉는 그림 앞에 선 관람객과 눈을 마주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2012년작 〈정면으로 응시하는 사람들〉이 생각났거든요. 유사한 장치가 있지만 날이 서 있던 그때에 비해 작품의 분위기는 훨씬 온화해졌어요. 그림 뒤에 있는 사람이 변한 탓일까요?
그사이 15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네요. 그렇게까지 긴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작가로서 작품을 대하는 방식은 많이 바뀐 것 같아요. 그때는 그림에 불안을 마구 표출하고 싶었어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해소가 되지 않았거든요. 이제는 불안이 있을지언정 작업 밖에서, 삶에서 해결하자는 생각이에요. 이번 작품들도 어떤 면에서는 충분히 감정적이지만 발산하지는 않죠. 대신 조용히 말을 걸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각자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든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 그랬다는 얘기를 들으면 가장 기쁠 것 같아요.
그래서 전시와 작품 제목에 너, 우리 같은 호칭을 자주 쓴 거군요. 익명의 관람객을 호명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떠올리도록 부추기는 거죠.
전시장 외벽에 쓰인 제목부터 시작인 거예요. ‘너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까?’를 읽으며 전시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 부지불식간에 ‘너’는 ‘나’가 되어 있겠죠.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었어요.
대부분의 제목이 문장형이기도 하죠. 작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기도 해요. 작품의 의도에 대한 힌트를 주고 싶은 건가요?
작업 노트는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 단서 같은 거잖아요.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업 노트나 도록, 전시 안내문보다 제목을 먼저 볼 거란 말이죠. 그러니 제목에도 이해를 돕는 단서가 녹아 있으면 했어요. 예를 들어, 포스터에 쓰인 작품에는 ‘새로운 시작 앞에서 우린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있었어’라는 제목이 붙어요. 만약 ‘무제’였다면 사람들은 대체로 울적한 장면들을 상상했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새로운 시작’에 방점이 찍혀 있었어요. 힘들어도 매일 새로운 아침은 주어지고, 그림은 그려야 하니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겠다, 마음을 먹었던 때였거든요. 이 작업과 수 개월 동안 함께 쌓아온 시간이 전달되었으면 하는데, 제목이 그 방향을 제시해주는 거예요. 〈나는 외롭지 않아〉 같은 경우는 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있는, 퍽 외로워 보이는 풍경인데 ‘The Sea and Sun Were Looking After Me’라는 영문 제목이 붙어요. 두 제목을 나란히 놓고 읽으면 비로소 이해가 되는 거죠. ‘나는 외롭지 않아, 바다와 해가 나를 돌봐주고 있으니까.’ 아마 대부분 지나쳤겠지만요.
저는 이 전시를 가장 마지막에 본 〈숲속에서 두 사람〉으로 기억해요. 내내 쓸쓸함, 처연함, 외로움을 느끼다가 초록 숲에서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풍경을 보니 꽉 닫힌 해피엔딩으로 끝난 드라마를 본 것 같았달까요. 이 전시가 관람객에게 어떤 감상으로 남아 있길 바라나요?
제가 바라는 건 하나예요. 시간의 밀도를 느끼길 바라요. 그림에 담긴 시간의 층위가 느껴졌으면 하는 거예요. 저는 작업을 80% 정도 완성했을 때 다른 작업을 시작해요. 그렇게 몇 번을 왔다갔다하면서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완성하죠. 말씀하신 〈숲속에서 두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시기로 따지면 전시장에 있는 모든 작품 중 가장 처음에 시작한 그림이지만, 거의 마지막에 끝냈어요. 한동안 쭉 방치해 뒀다가 심지어는 잊고 있었는데, 전시 작업을 마무리할 즈음에 번뜩 떠오른 거예요. 다시 꺼내서 보니 바꾸고 싶은 게 많더라고요. 지금보다 훨씬 여백이 많은, 미색 천이 그대로 보이는 그림이었거든요. 초록을 더 써서 깊은 숲으로 만들어버렸고 대화하는 두 사람의 그림자도 그리지 않았어요. 더 비현실적인 장면으로 보였으면 해서요. 그 사이 그리는 사람의 내면도, 그를 둘러싼 환경도 바뀌어 있어 결과적으로 전혀 다른 그림이 된 거죠. 하지만 캔버스 위에는 그 모든 때의 붓질이 다 녹아 있어요. 그 시간의 밀도가 어렴풋하게라도 전달이 되었으면 해요.
한 인간의 사사로운 일상과 내면의 변화와 골몰이 담긴 일기 같은 회화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종종 아득히 먼 과거와 제 작품을 나란히 두는 상상을 자주 해요. 먼 옛날 동굴 벽화에 새겨진 손자국과 지금의 내가 남긴 손자국은 너무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 사이의 시간은 자그마치 몇 만 년이죠. 저는 그림의 이런 지점이 재미있어요. 말과 소는 각각 몇 마리씩, 이쪽으로 가면 늑대, 사냥 갈 때는 셋 이상. 동굴 벽화에 남겨진 그림을 보면서 상상하잖아요. 그 시절의 삶은 그랬구나, 하고요. 이토록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내 그림도 언젠가 아득한 과거의 한 장면으로 남게 될 때가 오겠죠. 그거면 된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기록에 회화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단어가 사고 체계를 정의하는 것처럼, 그림도 한 시절, 한 세대를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너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까?»는 갤러리현대에서 4월 26일까지 진행된다.
고영진은 〈바자〉 피처 에디터다. 이우성의 그림 앞에서 모종의 이유로 헤어진 가족, 친구, 연인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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