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드라마는 현실에 존재했지만 잊힌 얼굴들을 현재로 소환한다. ‘허수아비’ 속 박해수는 굳건한 바위 같던 야만의 시대에 돌멩이를 던진 개인을 꺼내 왔다. 공감을 부른 열연으로 작품의 흥행을 이끈 박해수는 최근 일간스포츠와 만나 “그전까지 연기적으로 갈급함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지난 26일 종영한 ENA 드라마 ‘허수아비’는 1988년부터 2019년까지 30년의 세월을 오가며 악연으로 얽힌 두 남자가 연쇄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시청률 8.1%(닐슨코리아 전국 유료)로 ENA 월화드라마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한 드라마는 장르적 재미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 단면을 고발하고 성찰하는 메시지로도 호평받았다.
‘넷플릭스 공무원’이란 수식어를 떼고 5년 만에 안방극장에 복귀한 박해수는 “개인적으로 시청률을 오랜만에 봐서 잘 몰랐는데 좋은 결과를 받아 너무 감사하다”며 “TV 드라마는 부모님과 시골에 계신 할머니가 보실 수 있단 것이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어머니가 작품을 보시고 울면서 연락을 주셨어요. 그 시대를 살았고, 그 시대 때 두려워했던 분이다 보니, 작품 속 청년들이 너무 불쌍하다고 하셨어요. 그들을 짊어지고 있는 태주에 대해 마음이 아프다고 위로 해주셨죠.”
‘허수아비’는 1980년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경기 화성 등에서 벌어졌던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같은 사건에서 출발한 영화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키는 신도 있었으나, 진범이 검거된 뒤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차별화에 성공했다.
연쇄살인범은 물론, 사욕이 앞선 검사와 경찰조직이 개인의 삶, 나아가 사회를 망가뜨린 축으로 그려졌지만, 박해수가 연기한 형사 강태주조차 이들을 구원하는 영웅이 아닌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그는 “강태주는 완벽한 형사, 셜록홈즈 같은 인물이 아니라 매력적이었다. 마치 거꾸로 된 삼각형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고 짚었다.
그런 강태주는 드라마의 안타고니스트이자 검사 차시영 역과 호흡으로 서사의 깊이를 확장했다. 차시영을 연기한 이희준은 박해수와 연극계 선후배이자 절친이면서 같은 소속사 식구다. “세 번째 호흡인데, 이 작품에서 가장 깊고 뜨겁게 만났어요. 이번에 잘 안되면 다음은 같이하기 어려웠을 텐데, 다행히 ‘허수아비’가 굉장히 잘되어서 십 수년 더 함께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죠(웃음).”
19년 차 배우지만, 이희준과 따로 즉흥극을 하는 식으로 연기를 공부했단 점에서 열의가 전해진다. 이견 없이 훌륭히 극을 이끌었지만 박해수는 내내 “책임지기보단 기대어서 갔다”고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공을 돌렸다. 출연 직전 자신의 연기에 대한 고민을 무겁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물을 진짜 사람처럼 더 표현하고 싶었어요. 내 관찰이 부족한 건 아닌지, 기술적으로만 더 보여주고 싶어 했던 건 아닌지, 얇은 가면들을 계속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 그래서 ‘허수아비’에 도전해 깨뜨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두텁게 분석하고 대본 너머 삶을 상상하면서 구축한 강태주는 입체적이었다. 박해수는 “태주가 해결하지 못한 사건,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상실감을 안고 과오를 인정하기까지의 30년의 세월을 상상했다”며 “나이가 든 태주는 내가 이해하는 감정보다도 더 큰 그릇의 인물이었다. 나도 그런 면모를 하나라도 갖고 싶다”고 애정을 표했다.
또 하나의 장르물을 성공적으로 흥행시킨 박해수. 그는 ‘허수아비’를 보내며 “작품은 점점 잊히겠지만, 잊히지 않아야 할 것들에 대한 것들이 시청자의 기억에 남아 작은 메시지, 위로가 되면 좋겠단 생각을 많이 한다”고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러면서도 배우 인생의 다음 걸음도 바라봤다.
“그동안은 여러 겹을 가진 인물상이나 무게감 있는 사건을 좋아해서 장르물 위주로 도전했지만, 나이가 들다 보니 현실이나 가족 사이에 있는 아픔에도 눈길이 갑니다. 이젠 더 둔탁하고, 촌스럽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도 만나고 싶어요.”
Copyright ⓒ 일간스포츠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